어머니의 시간

30대 침묵 속의 강인함, 갓바위 아래

by 한시을

30대 5화: 침묵하는 사랑, 견디는 힘


어머니가 서른다섯이던 1978년, 안동에도 새로운 변화의 소식이 들려왔다.


라디오: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겠습니다!"


TV: "서울지하철 2호선 건설이 본격화됩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온 나라가 공사한다고 정신없어."


"서울에도 지하철이 늘어난다고 해."


"세상이 빨리 변하긴 하네."


하지만 어머니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있었다. 서른다섯 살 네 아이의 어머니에게 더 절실한 것은 아이들 교육과 하루하루 가족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침묵, 그 속의 사랑


막내의 사고 이후 변해버린 일상 속에서, 어머니는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셨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오히려 더 깊어진 사랑이 담겨 있었다.


특히 1977년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절정에 달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교육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고, 안동에서는 "안동고등학교만 들어가면 잘하면 서울대는 들어간다"는 말이 어머니들 사이에서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안동고등학교는 경북 북부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고 선망받는 학교였다. 서울이나 대구 같은 대도시는 이미 고교 진학이 추첨제로 바뀌었지만, 안동은 아직 시험을 치러 입학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첫아들인 내가 안동고등학교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매주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기도를 다니셨다. 새벽 일찍 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가서 돌계단을 올라 갓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우리 큰아들이 안동고등학교에 꼭 들어가게 해 달라."


어머니의 그 간절한 기도에는 단순히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라,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서도 아이만큼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해주고 싶다는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갓바위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무릎은 항상 먼지투성이였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도 다녀오셨어요?"


내가 물어보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냥 다녀왔다.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


말로는 담담하게 하셨지만, 어머니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아침이면 여전히 새벽 5시에 일어나셔서 네 아들의 도시락을 싸주셨다. 말없이, 그러나 정성스럽게. 김치 한 조각까지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골라 넣으셨다.


"도시락 잊지 마라."


"학교 다녀와라."


"공부 열심히 해라."


짧은 말씀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머니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계속 기울어지면서, 집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가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날이면, 부모님 간에 말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건가요?"


"아이들 교육비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우리는 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셨다.


어느 날 밤, 아버지의 술 취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 교통사고만 없었어도..."


"사업이 점점..."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만 내쉬셨다.


어머니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아버지와 다툴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조용한 동행으로 가족을 지켜주는 것을 택하셨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머니는 침묵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을까, 나는 안동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 한 마디에는 얼마나 많은 기도와 눈물이 담겨 있었을까.


첫 번째 헤어짐


1981년 봄, 어머니가 서른여덟이던 해였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첫 번째 헤어짐의 시간이 찾아왔다.


자취에 필요한 가재도구들을 챙기는 어머니의 손길이 평소보다 세심했다. 냄비, 접시, 숟가락, 젓가락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살펴보셨다.


"이 냄비로 라면 끓여 먹어라."


"밥은 이 솥으로 해 먹고."


"접시는 깨지기 쉬우니까 조심해서 써."


작은 외삼촌의 트럭에 짐을 싣고 어머니와 함께 대구로 향했다. 안동에서 대구까지 가는 길, 어머니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첫아들을 세상에 홀로 내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자취방에 도착해서 짐을 풀어놓고 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해 주셨는지 알 수 있었다. 반찬 몇 가지, 라면 한 박스, 쌀 한 포대까지.


"엄마, 너무 많이 가져왔어요."


"없으면 굶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


그때 어머니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걱정과 사랑이 동시에 담긴, 복잡한 표정이었다.


연탄보일러 사용법도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그 시절에는 연탄보일러가 보편적이어서 새벽 5시면 일어나 밤새 꺼진 불을 다시 살려야 했고, 하루에 2-3번씩 연탄을 갈아줘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연탄불부터 확인해라."


"연탄재는 이렇게 치우고."


"새 연탄은 이렇게 넣는 거야."


"바람이 센 날에는 연기가 역류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불완전연소로 일산화탄소 중독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가 지난 십몇 년간 매일같이 해오신 일이었다. 새까만 연탄재를 치우고, 무거운 새 연탄을 나르고, 바람 센 날이면 연기가 역류하지 않도록 신경 쓰고, 불완전연소로 일산화탄소 중독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했다.


여자인 어머니에게도 힘든 일이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을 스무 살 아들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우셨을 것이다.


전기밥솥은 귀한 물건이라 밥은 냄비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연탄불이 꺼지면 잠자리도, 밥도 다 날아갈 판이었다. 그런 번거로운 일상을 이제 서툰 아들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이 가슴 아프셨을 것이다.


"집에서는 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챙겨주던 따뜻한 밥과 깨끗한 빨래를, 이제 모든 것이 서툰 아들이 혼자 해내야 한다니... 내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 텐데..."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짐 정리를 마치고 다시 안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작은 외삼촌의 트럭에 올라타신 어머니가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셨다.


그때 어머니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우시고 계셨던 것이다. 트럭이 멀어져 가는 동안 어머니는 계속 우시고 계셨다.


그 눈물 속에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 그리고 어머니로서 더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아들 짐을 정리하고 다시 안동으로 되돌아갈 때 트럭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우시던 뒷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


첫째가 대학에 간 이후, 가정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그리고 집에 남은 세 아들의 교육비까지. 아버지의 가구 사업 수입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가세는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안동 시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담한 한옥은 산꼭대기 주택으로 바뀌고, 가구점과 공장은 처분되고 아주 작은 공간으로 이전됐다.


아버지의 일거리가 줄어들자, 생계도 어려워졌다. 쌀독이 비는 날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드셨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서도 밭농사 품앗이를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때로는 한여름날 밭농사 품앗이도 하셨다. 그렇게 그 당시 어머니 땀은 우리들의 식량이 되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차린 다음 밭으로 나가셨다. 오이, 고추, 호박을 따고, 풀을 뽑고, 거름을 주는 일까지 하셨다.


"오늘 일당이 얼마나 나왔냐?"


동네 아주머니들이 서로 물어보곤 했다.


"겨우 밥값이지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어머니는 이런 대화를 들으면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어머니의 손은 흙투성이였고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저녁 준비는 그 누구보다 정성스럽게 하셨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단 한 번의 원망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짐을 챙기고, 새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는 일상적인 모습뿐이었다.


"엄마, 너무 힘들지 않아요?"


가끔 내가 물어보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힘든 게 어디 있겠냐. 일하면 돈이 되는데."


그 말속에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밭일이 없는 날에는 다른 집 빨래를 해주거나, 김치를 담가주는 일도 하셨다. 어머니의 손이 워낙 깔끔하고 음식 솜씨가 좋아서, 동네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훈이 엄마 손은 정말 믿을 만하다."


"깔끔하게 잘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셨다. 칭찬을 받는 것보다는 가족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는 것이 더 기뻤을 것이다.


둘째에 대한 꿈


그 무렵 어머니에게는 둘째에 대한 특별한 꿈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둘째는 참 의젓하다."


"리더십도 있고, 책임감도 강해."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박정희 대통령도 사관학교 출신이시잖아. 나라를 이끄는 훌륭한 분들이 다 거기서 나오더라."


어머니의 말씀에는 그 시대 많은 어머니들이 품었던 소박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사관학교 나오면 장교가 되는 거 아니냐?"


"나라를 지키는 일이니까 얼마나 자랑스럽겠어."


그 시절만 해도 군인은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특히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엘리트였다.


어머니에게 둘째의 사관학교 진학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어머니는 둘째의 성적표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곤 하셨다.


"이 정도 성적이면 사관학교 갈 수 있을까?"


"좀 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아이들도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술주정, 경제적 어려움,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까지.


하지만 가정의 어려운 상황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를 부축하며 집으로 가던 중, 아버지가 갑자기 "둘째가 공부한다는 곳에 가보자"라고 하셨다. 시내 어딘가, 아마도 사찰이었던 것 같은 조용한 곳에서 둘째와 친구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가정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온전히 자신의 꿈에만 집중하기란 쉽지 않겠구나.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는 별개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결국 둘째는 일반 대학으로 진학했고, 나 역시 재수를 생각했지만 집안 사정과 동생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냥 대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꿈은 무너졌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둘째에게 더 좋은 참고서를 사주고, 과외 선생님도 알아보셨다. 비록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이들 교육만큼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침묵으로 견딘 사랑의 힘


1979년,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웠다.


TV: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했습니다..."


라디오: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머니의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고, 저녁에 돌아와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평범한 하루들.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으로 경제 도약을 꿈꾸는 동안, 어머니는 품팔이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현실과 씨름하고 계셨다. 정부가 "선진국 진입"을 외치는 동안, 어머니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계셨다.


어머니의 침묵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말로 표현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불평하는 대신 묵묵히 감당하는, 그것이 어머니만의 사랑 방식이었다.


갓바위에서 드리던 간절한 기도, 첫아들을 떠나보내며 흘렸던 눈물, 뜨거운 햇볕 아래서 흘린 땀방울까지. 모든 것이 말없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청춘을 가족을 위해 조용히 바치며, 침묵하는 사랑으로 견디는 힘을 보여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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