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홀로서기의 시작
1984년 봄, 어머니가 마흔두 살이던 해였다.
TV: "3저 호황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수출 100억 달러 돌파! 한강의 기적이 계속됩니다!"
온 나라가 경제 성장에 들떠 있던 시절이었다. 기름값이 떨어지고, 이자율이 내려가고, 달러가 약해지면서 수출기업들이 웃음꽃을 피웠다. 서울과 부산에는 고층 빌딩이 하루가 다르게 솟아올랐고, 아파트 분양 광고가 신문 지면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런 경제 성장이 체감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마흔을 넘긴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네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1984년을 기점으로 우리 가족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시골에서 치른 장례는 여전히 옛 방식이었다. 아버지는 4형제 중 둘째였지만, 사업이 기울어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사업으로 일으킨 경제적 기반이 있어서 장례식 전반을 주관하셨다.
할아버지 댁과 작은할아버지 댁에 흰색 차양막을 치고도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시골의 여러 친척분들과 인근 마을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하셨다. 안동의 유교 전통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퇴계와 서애의 고장답게, 어른들은 여전히 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조문을 오셨다.
조문객들이 가져온 부조도 곡식과 음식, 술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니는 둘째 며느리로서 조문객 접대와 음식 준비에 분주하셨다. 1965년 고모 결혼식에서 보았던 그 전통적 부조 문화가 20년이 지난 1984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조짐도 보였다. 젊은 조문객들 중에는 흰 봉투에 돈을 넣어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과도기였다.
5일장을 치르는 동안 어머니는 시골 대가족의 상례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셨다. 수십 명의 친척들을 위해 끼니를 준비하고, 밤새 빈소를 지키고,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일까지. 며느리로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묵묵히 감당하셨다.
그런 변화를 지켜보며, 어머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빠르게 달라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례를 계기로 집안의 경제적 부담은 더욱 커졌다. 장례 비용은 물론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정신적 지주까지 사라진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회복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은 말이 아닌 모습으로 남았다. 평생을 농사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할아버지의 삶을 보며, 어머니는 자신이 이제 가족을 지켜야 할 차례라는 것을 깨달으셨다.
매달 오던 생활비가 1주일, 2주일로 지체되기 시작했다. 금액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의 가구 사업은 점차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고, 술에 의존하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마지막 안전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 되었다. 대학생 둘에 고등학생 하나, 중학생 하나. 학비와 생활비 부담은 어머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둘째도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생활 동안 내내 경제적 여건이 발목을 잡았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휴학과 복학을 거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세가 기울어지자 그 여파는 나이 어린 동생들 순서로 더 크게 미쳤다. 셋째는 19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입학금이 없어 입학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합격의 기쁨도 잠시, 현실 앞에서 좌절해야 했던 셋째는 그 이후 부산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떠났다.
막내는 더욱 힘든 시기를 보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성장기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과 사춘기와 겹치면서 학교 다니기가 싫을 정도였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맏형으로서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상황이 미안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평소 정갈하고 뛰어난 음식 솜씨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셨던 것을 살려 식당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셨다.
어머니의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정갈함으로 유명했다. 김치 하나를 담가도 다른 집과는 달랐고, 된장찌개 하나를 끓여도 깊은 맛이 났다. 이는 어머니가 20여 년간 가족을 위해 갈고닦은 솜씨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면서도 집안의 정리정돈과 청결함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도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하시려 애쓰셨다.
"일하는 것은 괜찮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지."
어머니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불평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머니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수입만으로는 늘어나는 자식들의 지출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가족 모두가 극도의 절약 생활로 전환해야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나 며느리가 아닌, 온전한 가장이 되셨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말이다.
그 시절 우리 형제들에게는 기댈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가정의 버팀목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어머니마저 하루하루 생계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각자도생의 생존 모드였다. 셋째는 부산에서 일하며 자립을 위해 애썼고, 막내는 돈을 아끼기 위해 일부러 고향에 있는 대학을 선택했다.
나 역시 1986년 군에 입대하면서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군 복무 중에는 특별하게 지출되는 웃돈이 없어, 그나마 한 명의 식비와 생활비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런 현실 앞에서도 한 번도 원망을 표현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성격상 불필요한 말을 삼가시고 타인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셨기에, 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더욱 없으셨다.
식당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들들과는 주로 숙제나 공부, 집안일 등 필요한 대화를 나누셨다.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셨지만, 자식들의 성적과 장래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공부는 어떻게 되고 있냐?"
"시험은 언제야?"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더냐?"
이런 실용적인 질문들이 어머니와 아들들 사이의 주된 대화였다. 그래도 닦달하는 스타일은 아니셔서, 묵묵히 뒷바라지만 해주시는 것이 어머니만의 사랑 표현이었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 집안 형편을 물어보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시곤 했다.
"그냥 살아가는 거지 뭐.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되는 거고."
어머니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에게 동정받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 무렵 안동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1987년 6월, 전국이 민주화의 함성으로 들끓을 때도 안동의 거리는 여전히 고요했다. 시위 대신 차분한 대화가, 구호 대신 깊은 한숨이 오갔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안동의 어른들은 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선호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격변보다는 가족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아들들의 교육만큼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교육비는 최우선이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
1980년대 중반, 온 나라가 '3저 호황'에 들떠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런 경제 성장의 혜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 정도로만 치부될 뿐 이도저도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아파트값이 치솟고, 강남 개발로 부동산 붐이 일었지만, 안동은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했다. 1976년 안동댐 완공으로 수몰된 마을들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하나둘 서울, 부산으로 떠나갔다.
어머니의 친정인 이모집도 예안면에 있었는데, 댐 건설로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어머니는 가끔 이모집을 찾아가셨지만, 그곳에서도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쓸쓸함을 마주해야 했다.
선조들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안동의 인구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그 속에서 어머니는 홀로 네 아들을 키워내야 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망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변화를 받아들이고, 실질적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 나가기 시작하셨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어머니에게 대학 진학률이니 여성 전문직이니 하는 것들은 남의 세상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학력으로 재단할 수 없는 지혜가 있었다. 네 아들을 키우면서 터득한 살림 솜씨, 음식 솜씨는 어떤 전문 기술보다 실용적이었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어머니는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 해방'이나 '자아실현' 같은 거창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저 아들들을 끝까지 키워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어머니에게 정치란 아들들의 학비를 걱정하는 일상보다 훨씬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네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40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지막 의지처를 잃었지만, 동시에 진정한 독립을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비빌 언덕 없는 현실 속에서 어머니는 스스로 산이 되기로 결심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