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홀로서기
1988년 가을, 어머니가 마흔다섯이던 해였다.
TV: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88 올림픽으로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평가가..."
온 나라가 올림픽의 감동과 자부심에 젖어 있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의 성과를 전 세계에 선보인 역사적인 해였다. 거리마다 "We are the Champions"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희망차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는 현실은 전혀 달랐다. 국가적 환호와 개별 가정의 절망이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은 둘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지속적으로 제공받을 수 없어 휴학과 복학을 거듭해야 했다. 결국 둘째는 부산으로 가서 일자리를 구하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려 애썼다.
그런데 1989년 여름, 둘째에게 갑작스러운 병이 찾아왔다. 얼굴과 팔, 다리가 심하게 부어오르는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신장염이었다. 8월 5일부터 14일까지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안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고, 나는 제대 후 복학하여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금처럼 간병인을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내가 2-3일씩 번갈아가며 병문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두 번씩 어머니는 안동에서 대구까지 버스로 2시간씩 걸리는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둘째를 돌보러 다니셨다.
30대에 막내의 교통사고로 겪었던 그 막막함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경제적, 심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둘째가 퇴원한 후에도 안동에서 통원 치료를 꽤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치료비와 약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번에도 묵묵히 모든 것을 감당해 내셨다.
"아프면 치료해야지. 건강이 제일이야."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절대 치료비를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자식의 건강 앞에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던 날, 어머니는 안동역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서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머니는 44세셨다.
"몸 조심하고, 사고 나지 않게 조심해라."
"편지 자주 써라."
"아프면 바로 연락하고."
어머니는 평소보다 말이 많으셨다.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다. 아들 하나가 군대에 가는 것도 경제적으로는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었지만, 모든 엄마의 입장에서 아들의 입영은 일제강점기 징용 가는 만큼이나 불안한 것이었다.
기차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신 기억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는 특별히 그러셨다.
"잘 다녀와라."
그 말씀 속에는 '무사히 돌아오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경기도의 모 부대에서 열린 훈련병 수료식에 어머니가 참석하셨다. 그 멀고 낯선 곳까지 아들을 보러 오신 어머니. 다른 부모들과 함께 서 계신 모습에서, 어머니 나름대로 자식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표현하려 하셨던 것 같다.
훈련병 수료식 후 잠시 면회 시간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 오셨다. 김치와 밑반찬이 들어있는 소박한 도시락이었지만,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집 음식이 그리웠지?"
"많이 먹어라."
어머니의 음식에는 항상 특별한 것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조미료가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형제들은 하나둘 군대에 입대했다. 1985년 둘째가, 1989년 셋째가 각각 해병대에 입대했다.
둘째가 나보다 반년 먼저 군에 들어갔는데, 내가 군복무 중일 때 둘째가 면회를 온 적이 있다. 그때 둘째가 초코파이를 사 왔는데, 면회실에서 동생이고 뭐고 염치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다 먹어버렸다.
군대는 항상 배고픈 곳이었다. 지금이야 병사들의 월급이 크게 올라 다양한 간식거리로 하루 고된 훈련을 위무하는 병영문화가 보편화되었지만, 그 당시 그 초코파이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 봐도 미안하고 고마운 기억이다.
나중에 셋째가 해병대에 입소했을 때는 내가 면회를 갔다. 해병대 훈련소의 험한 환경을 보며,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하나둘 군대에 가는 것을 지켜보시며 또 다른 걱정과 그리움을 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집안의 경제적 부담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1988년 제대 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현관문을 열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분이 나와서 "누구를 찾으세요?"라고 물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뭔가 집안에 큰일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물어보니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그 이사한 집에 가니 할머니도 함께 생활하고 계셨다. 그전에는 큰집에 계셨는데, 이제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집을 잃고, 시어머니까지 모시게 된 상황이었다.
바로 그해, 대한민국은 서울올림픽이라는 역사적 축제를 치르고 있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되었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의 성과를 세계에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경매 통지서가 날아들고 있었다. 레슬링에서, 복싱에서 금메달에 온 나라가 열광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이삿짐을 싸고 계셨다.
우리의 삶이 타인의 삶과 같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적 환호와 개별 가정의 절망이 정확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사한 집은 이전보다 훨씬 작고 낡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새 집을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어디서 살든 깔끔하게 정돈하는 것이 어머니의 원칙이었다.
"집은 집이야. 가족이 함께 있으면 되는 거지."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셨다.
40대 후반에 어머니는 식당일을 넘어 직접 작은 식당을 차리셨다. 평생 갈고닦으신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 솜씨를 바탕으로 한 선택이었다.
어머니는 사람들과의 교류 폭이 넓은 편은 아니셨고, 신변잡기나 잡담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셨지만, 음식만큼은 자신이 있으셨다.
메뉴도 복잡하지 않았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제육볶음, 생선구이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달랐다. 된장찌개 하나도 깊은 맛이 났고, 김치찌개는 정말 집에서 끓인 것 같은 맛이었다.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주머님, 여기 음식은 정말 집밥 같아요."
"어머니가 해주신 것 같은 맛이에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셨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어머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으셨다.
"오늘은 손님이 적네."
"내일은 좀 나으려나."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는 모습을 가끔 봤지만, 절대 포기하지는 않으셨다.
네 아들을 끝까지 키워내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버텨내셨다.
아침 일찍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 오고,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하시는 어머니의 하루는 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가 걱정하지 않도록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셨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였다.
TV: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습니다! 동서독 통일의 전망이..."
라디오: "냉전 종식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둘째의 건강, 셋째와 막내의 교육, 그리고 할머니 뒷바라지까지.
하지만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셨다. 남편의 도움도, 시댁의 지원도 기대하지 않으셨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지켜내고 계셨다.
진정한 홀로서기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40대에 완성해나가고 계셨다.
식당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동시에 뿌듯함도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이 있으셨던 것 같다.
"힘들어도 내 일이니까 괜찮아."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지."
어머니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국가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자신을 알렸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지켜보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실감했다. 하지만 세계와 국가는 각각 환호와 통합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세계에서는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으셨다.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며, 진정한 자립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계셨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어머니의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