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홀로서기의 시작
라디오에서 임창정의 '소주 한 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991년 가을, 온 나라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소식으로 떠들썩했지만, 49세의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탄생하고, 냉전 체제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현실 앞에서 어머니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계셨다.
전국적으로는 한중 수교가 성사되면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안동에서도 "이제 중국 장사꾼들이 몰려올 거래"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정작 안동 시장 상인들은 여전히 하루하루 장사에 매달려야 했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민정부 출범을 앞두고 온 나라가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세상을 떠난 현실 앞에서는 정치적 변화보다 일상의 생존이 더 절실했다.
1991년 11월 29일, 아버지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갑나이인 어머니는 과부가 되었다. 장례식 날 외삼촌들이 조문을 왔을 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외삼촌들을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하셨다.
"동생들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노..."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 같았다. 비록 실질적인 가정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심리적 안전감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마저 사라지니 이제 정말로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TV: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출범했습니다. 정치권 재편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지만,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파국이 더 절실한 현실이었다. 이제 정말 나 혼자구나... 49세 과부로 아들 넷을 다 키워야 하는구나... 그런 절망감과 막막함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주저앉지 않으셨다. 오히려 더욱 단단해지셨다. "울 시간도 없다"라고 하시며, 장례를 치르고 나서 바로 다음 날부터 다시 식당일을 시작하셨다. 네 아들을 끝까지 키워내야 한다는 신념이 슬픔보다 앞섰다.
이웃들은 "좀 쉬어 가면서 해... 건강 해치겠어"라고 걱정했지만,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당신의 건강보다는 당장 내일의 생계가 더 중요했다. 아들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체면이나 격식 같은 것들은 사치였다.
이듬해 나는 29세에 결혼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첫아들을 장가보내는 기쁨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들은 대부분 아파트 전세를 기본으로 신혼생활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조그마한 단독주택 전세부터 출발해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을 위해 마음을 많이 쓰셨지만,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을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결혼 준비와 신혼살림에 드는 비용은 사실상 며느리가 전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안하구나... 제대로 뒷받침을 못해줘서..."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여러 번 표현하셨다. 첫아들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현실이 마음 아프셨을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 괜찮아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도 어머니는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려 하셨다. 비록 경제적 지원은 어려웠지만,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어머니만의 세심함과 정성을 보여주려 애쓰셨다. 혼수품 하나하나를 직접 확인하시고, 예단도 함께 골라주셨다.
어머니가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구나...
경제적으로는 도움을 못 주셨지만, 어머니 나름대로 첫아들의 결혼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것이 전해졌다. 그것이 어머니가 그동안 겪어온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결혼식 날,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셨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정갈하고 단정한 모습이셨다. 하객들 앞에서도 당당하셨다. "첫아들 장가보내는 날"이라며, 그날만큼은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셨다.
어머니의 40대가 끝나가던 1991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는 이 십 년 동안 단순히 '버텨낸'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홀로서기를 완성한 것이었다.
20대에 결혼과 출산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배웠고, 30대에 자녀 양육을 통해 어머니의 본분을 익혔다면, 40대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확고한 중심을 세운 것이었다. 그 중심이란 무엇이었을까.
남편에 대한 의존도 아니고, 자식들의 성공에 대한 기대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30대 막내의 교통사고에 이어 40대에는 둘째의 신장염까지 겹치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들이 하나둘 군대에 가도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평생 갈고닦은 음식 솜씨, 깔끔하게 집안을 꾸리는 능력, 그리고 어떤 역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였다. 이것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어머니 자신이 삶을 통해 체득한 것들이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누군가의 부속물이 아니구나...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어머니도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이었다. 물론 여전히 아들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자신만의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 남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연이은 시련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지켜내는 사람.
어머니는 49세에 과부가 되었지만, 동시에 40대 말에 비로소 완전한 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기댈 곳도, 숨을 곳도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다. 바람이 세게 불수록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시련이 클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모습이었다.
첫아들을 장가보내면서, 어머니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고 계셨다. 이제 며느리라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게 되었고, 곧 할머니가 될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다. 40대가 끝나가면서, 어머니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것이 40대를 관통하며 어머니가 완성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1991년은 대한민국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냉전 체제가 종식된 해였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세계 질서가 급변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북방외교를 통해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탄생하면서 정치 지형도 크게 바뀌었다. 온 나라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안동의 한 여인에게는 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세계가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동안, 49세의 어머니는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사라지는 동안, 어머니는 오히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거대한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는 동안, 어머니는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내면의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40대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격동하는 시대 한편에서 일어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위대한 성장의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