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50대 : 절망적 현실 속의 생존 의지

by 한시을

10화: 현실로 다가온 삶의 도전


라디오에서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992년 봄, 온 나라가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을 기대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말하고 있었지만, 50세의 어머니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30년 군사정권의 종료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진이라는 거대한 변화보다, 홀로 네 아들을 키워야 하는 막막한 현실이 훨씬 더 절박했다. 어머니의 50대는 이렇게 깊은 절망감과 함께 막이 올랐다.


전국에서는 문민정부의 개혁 의지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안동에서도 "이제 진짜 깨끗한 정치를 볼 수 있겠다"는 희망적인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실상 안동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실용적이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시장 장사가 잘 되고, 농사가 잘 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어머니에게는 더욱 그랬다. 정치적 변화보다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텨낼 것인가가 더 절실한 고민이었다.


홀로서기의 참혹한 현실


1992년 초, 남편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가장'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머니에게는 심리적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것 같다. 그마저 사라지자 어머니는 완전히 홀로 서야 하는 현실과 마주했다.


둘째와 막내는 여전히 대학생이었고, 등록금과 생활비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었다. 첫째인 나는 결혼 준비로 바빴고, 셋째는 제대 후 취업과 대입 준비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머니의 어깨에만 올려져 있었다.


"이제 정말 내가 다 해야 하는구나..."


어머니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막막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50세에 과부가 된 현실, 그것도 아직 키워야 할 자식들이 둘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안동 전통시장에 작은 식당을 차린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50대 여성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평생 갈고닦은 음식 솜씨가 유일한 자산이었고, 시장이라는 공간이 유일한 무대였다.


새벽부터 밤까지의 고된 일상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시장 상인들보다도 일찍 일어나 장을 보고, 그날 쓸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문을 열어 점심 장사를 하고, 오후에는 잠깐 쉬었다가 저녁 장사까지 이어갔다.


"손님, 어서 오세요. 뭘 드실까요?"


어머니는 항상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하셨다. 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피로와 걱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해도 벌어들이는 돈은 뻔했다. 재료비와 시장 임대료를 제하고 나면, 둘째와 막내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돈이 부족하면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밑반찬까지 만들어 팔며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리려 애썼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고생하고 계시는구나...


가끔 식당에 들른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어머니는 오히려 웃으며 대답하셨다.


"괜찮다. 일하는 게 몸에 배어 있어.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답답해."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고단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첫 며느리와의 새로운 관계


1992년 첫째가 결혼하면서, 어머니는 생전 처음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큰 부담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며느리를 제대로 대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우리 집이 변변하지 못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어머니는 며느리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바라볼지 내내 신경 쓰셨다. 다른 집들처럼 넉넉한 혼수를 준비해줄 수도 없고, 신혼살림을 제대로 차려줄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른 방식으로 며느리에게 마음을 표현하려 하셨다.


"우리 며느리 고생 많다. 이런 집안에 시집와서..."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자주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며느리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셨다. 돈으로는 도움을 드릴 수 없지만, 마음만큼은 아끼지 않으시려는 노력이었다.


이 시기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 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지원하는 제도들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동 같은 전통적인 지역에서는 여전히 며느리는 시댁을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어머니도 그런 전통적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셨다. 하지만 자신이 제대로 뒷받침해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오히려 며느리에게 더 미안해하셨고, 더 배려하려 애쓰셨다.


둘째와 막내를 향한 무거운 책임감


째와 막내의 대학 뒷바라지는 어머니에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 등록금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생활비와 교재비까지 합치면 식당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둘째와 막내도 어머니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스스로 돈을 벌려고 애썼지만,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들을 보며 더욱 마음이 아팠다.


"공부할 나이에 돈 걱정을 해야 하다니..."


어머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는 아들들에게 미안해하셨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학비 걱정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자책거리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들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같은 처지 여성들과의 연대


시장에서 만나는 다른 여성 상인들과의 만남은 어머니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 중에는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요즘 여자들 참 힘들게 산다. 우리 때는 이럴 줄 몰랐는데..."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야지. 애들은 키워야 하고..."


이런 대화들이 어머니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정을 찾아갔다. 서로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때로는 조그만 도움을 주고받으며 버텨나가는 일상이었다.


변화하는 시대, 변하지 않는 현실


1995년에 접어들면서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정책들이 본격화되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하나회 척결이 진행되면서 사회 전반에 투명성이 높아졌다. 지방자치제도 전면 실시되어 지역 정치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새벽 일찍 일어나고, 여전히 밤 늦게까지 일하고, 여전히 부족한 돈 때문에 고민하는 나날이었다. 사회가 아무리 투명해지고 민주적으로 변해도, 홀어머니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꿋꿋하게 버텨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것으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갔다. 그것이 50대 초기 어머니가 보여준 가장 위대한 모습이었다.


개혁의 물결 속, 묵묵한 생존의 기록


1995년은 김영삼 정부가 과거 청산과 미래 비전을 동시에 추진했던 해였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역사의 심판이 이루어졌고, 세계화 선언을 통해 국제사회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꽃피기 시작했고, 안동에서도 시민들의 정치 참여 의식이 높아져 갔다.


하지만 안동 시장 한 켠에서는 더 근본적이고 절실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라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동안, 어머니는 절망적 현실에서 벗어나 홀로서기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사회가 투명성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동안,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으로 가족을 지켜내고 있었다. 온 나라가 세계화라는 거대한 도전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시장이라는 작은 무대에서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도전에 맞서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50대 초기의 이야기였다. 절망으로 시작된 십 년에서 피어난, 가장 묵묵하지만 가장 강인한 생존 의지의 첫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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