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50대 절망적 현실 속의 생존 의지

by 한시을

11화 가족의 확장과 새로운 희망


라디오에서 듀스의 '우리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994년 여름, 온 나라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51세의 어머니에게는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찾아왔다. 첫 손자가 태어날 예정이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외치며 국제 사회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관심은 온통 곧 태어날 손자에게 쏠려 있었다. 50대 중반의 어머니에게 손자의 탄생은 절망적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안동에서도 "경제가 좀 나아지는 것 같다"는 말이 들렸고, 시장 상황도 이전보다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경제적 재앙이 온 나라를 강타했다. "이제 정말 어떻게 되는 거냐"는 절망적인 목소리들이 안동 시장 곳곳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런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이 있었다. 바로 가족의 확장이었다.


첫 손자의 탄생, 새로운 기쁨의 시작


1994년 늦여름, 며느리가 첫 아이를 가지면서 어머니의 마음에도 새로운 설렘이 시작되었다. 평생 아들만 넷을 키워온 어머니에게 손자는 또 다른 의미였다. 이제 자신이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셨다.


"할머니라... 내가 이제 할머니가 되는구나..."


어머니는 혼자 중얼거리시며 신기해하셨다. 시장에서 만나는 단골 손님들에게도 자랑하셨다. "우리 첫 손자 생길 거예요. 며느리가 몸이 무거워졌어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해산 날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더욱 초조해하셨다. 며느리가 병원에서 진통을 시작했는데 아이가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어머니는 안동에서 대구까지 달려오셨다.


"애미야... 왜 그리 애가 안 나오니... 나는 넷씩이나 낳았는데도 별 문제없었는데..."


안절부절못하던 어머니는 결국 안동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삼신 할매에게 애미가 순산토록 기도해 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이 손자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제왕절개로 손자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고생한 며느리보다 아기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셨다.


"아이고... 우리 손자... 어디... 보자..."


그러면서 아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셨다. 51세의 어머니에게 손자의 존재는 힘든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새로운 의미였다. 그동안 식당일과 자식 뒷바라지에 지쳐있던 어머니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과 가족의 힘


1997년 말, 나라 전체가 IMF 외환위기로 휘청거렸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구조조정, 명예퇴직, 조기퇴직이라는 단어들이 일상어가 되었고, 중산층 가정조차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안동도 전국적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IMF 사태까지 겹치면서 더욱 힘들어졌다. 장꾼들도 줄어들고, 외식보다는 집에서 해 먹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시장 내 식당들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았다.


"이제 정말 어떻게 사는 거냐..."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는 절망적인 목소리들이 오갔다. 어머니의 식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수입도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어도 버텨야지. 우리 손자도 있고, 둘째도 결혼해야 하고..."


바로 그해, 1997년에 첫 손녀도 태어났다. 손자에 이어 손녀까지 생기면서 어머니의 마음에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기쁨이 더해졌다. 가족이 늘어간다는 것 자체가 어머니에게는 희망이었다.


둘째 아들의 결혼과 새로운 며느리


1998년 1월, IMF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아직 걷히지 않은 상황에서 둘째가 결혼했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셨지만, 동시에 경제적 부담 때문에 제대로 된 혼수를 준비해주지 못한 것을 내내 미안해하셨다.


"이런 어려운 시국에 결혼하게 되어서 참 좋기는 하다마는..."


어머니는 둘째 며느리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IMF로 인해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결혼 준비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 괜찮아요. 이런 때일수록 가족이 힘을 합쳐야죠."


그해 11월에는 둘째 며느리가 첫 딸을 낳았다. 나에게는 첫 조카가 되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또 다른 손녀의 탄생을 무척 기뻐하셨다.


"우리 집에도 꽃이 또 하나 피었구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힘든 살림살이 속에서도 가족이 늘어난다는 것은 분명한 희망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더욱 어려워졌지만, 마음만큼은 풍요로워지는 느낌이었다.


며느리들을 바라보는 복합적 시선


두 명의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가 되면서, 어머니는 여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며느리였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며느리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대구에 신혼집을 차린 우리 부부는 셋째를 오라고 해서 같이 생활하면서 그의 대학 진학을 도왔다. 경제적 여건상 어머니가 직접 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부부의 도움은 절실했다. 특히 첫째 며느리가 시동생의 학비와 숙식을 지원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해 준 것을 어머니는 평생 고마워하셨다.


"어디 내세울 것 없는 집안에 시집와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어머니는 첫째 며느리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한편 둘째가 또 신장이 좋지 않아 대구에서 입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안동에서 식당을 운영해야 해서 곁에 있어줄 수 없었는데, 첫째 며느리가 여러 모로 챙겨서 병원 생활이 불편하지 않게 해 주었다.


"애미야... 너가 고생이다..."


어머니는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시며 며느리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통적으로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오히려 고마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전통적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었다. 젊은 며느리들이 직장을 다니면서도 시댁 일까지 챙겨야 하는 이중 부담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도 그런 현실을 목격하면서 "요즘 며느리들 참 고생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마음은 복잡했다. 며느리들에게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며느리 노릇은 해야지"라는 생각도 있으셨다.


할머니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1998년 말, 어머니는 손자 하나, 손녀 둘을 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55세의 어머니에게 할머니라는 역할은 새로운 활력소였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손주들 때문에 마음만큼은 풍요로웠다.


시장에서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도 달라졌다. 이제는 "우리 손자가...", "우리 손녀가..."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힘든 일상 속에서도 손주들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어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손주들 보면 피곤한 것도 다 잊어버려..."


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고된 일상이었지만, 손주들을 볼 때만큼은 모든 것이 보람으로 바뀌었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가 육아 때문에 어려워할 때, 어머니는 도와주고 싶어 하셨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내가 서울로 직장을 얻어 주말부부가 되면서, 아내 혼자서 직장과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했을 때, 어머니는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마음으로는 당장 달려가서 도와주고 싶으셨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손주들보다 더 절실한 현실이었다.


위기 속에서 피어난 가족 사랑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도, 아니 그래서 더욱 어머니에게는 가족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는 더욱 어려워졌지만, 손자 손녀들의 탄생과 며느리들과의 새로운 관계는 어머니에게 버텨낼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


어머니의 50대 중반은 그렇게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나라 전체가 경제적 위기로 휘청거리는 상황에서도, 어머니만의 작은 행복들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다. 그것이 어머니를 지탱하는 진짜 힘이었다.


경제 위기 속 피어난 희망의 꽃들


1998년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경제 회복을 위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해였다. 구조조정의 고통 속에서도 국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었고, "다시 한번 해보자"는 의지로 뭉쳤다. 안동에서도 "어려워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고, 시장 상인들도 서로 격려하며 버텨나갔다.


하지만 안동 시장 한 켠에서는 경제 위기보다 더 강력한 희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라가 외환 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50대 중반의 어머니는 가족의 확장이라는 개인적 희망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동안, 어머니는 할머니라는 새로운 역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재구성해가고 있었다. 온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 노력하는 동안, 어머니는 며느리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가족이라는 끈끈한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50대 중반의 이야기였다. 경제적 절망 속에서도 피어난, 가장 소중하고 가장 따뜻한 가족 사랑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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