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새천년의 희망과 시련"
TV 화면에서는 붉은 악마들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2002년 여름,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지만, 60세가 된 어머니에게는 조금 다른 설렘이 있었다. 둘째 며느리가 둘째 딸을 가진 것이다. 히딩크의 4강 신화보다 더 가슴 뛰는 소식이었다. 새천년을 맞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곧 태어날 손녀가 더 소중하고 확실한 희망이었다.
거리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60세의 어머니는 문득 격세지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이런 집단적 열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안동이라는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고장에서는 집단적 열광보다는 차분한 관망이 더 익숙했다. 월드컵 응원도 TV로 지켜볼 뿐, 거리로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런 조용한 일상 속에서도 어머니만의 새로운 역할이 시작되고 있었다.
2002년 9월 23일, 둘째 며느리가 둘째 딸을 낳았다. 어머니는 그다음 날 새벽부터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정성스럽게 우린 미역을 넣고, 소고기를 볶아 깊은 맛을 내셨다. "산모는 미역국을 먹어야 몸이 회복된다"는 어머니의 철칙이었다.
한 솥 가득 끓인 미역국을 들고 안동에서 대구까지 가시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60세가 되어서야 맛보는 할머니로서의 설렘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갓 태어난 손녀를 보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아이고... 우리 손녀... 할미가 왔다..."
손녀를 처음 안아보시는 어머니의 표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했다. 50대 내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세월에서, 이제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는 시기에 맞아 든 선물 같은 존재였다.
둘째 며느리는 지금도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머님께서 직접 끓여주신 그 미역국을 산후조리 내내 먹었어요. 정말 정성이 가득했고, 손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에게 네 번째 손주의 탄생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서는 의미였다. 이제 진정한 할머니가 되었다는 실감이었다. 첫 손자는 이미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명절 때 안동에 내려오면 어머니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손자를 돌봐주셨다.
"할머니, 이거 해주세요", "할머니, 저거 사주세요"
어린 목소리에 어머니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느끼셨다. 60대에 접어들면서 어머니의 삶에는 새로운 의미가 생겼다. 더 이상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로서 손주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즐거움이 있었다.
60세가 된 어머니에게 며느리들은 이제 단순한 며느리가 아니라 함께 가족을 꾸려가는 동반자였다. 첫째 며느리인 집사람은 내가 직장이 서울에 있는 관계로 직장과 육아를 온전히 도맡아 힘겨워했고, 둘째 며느리는 두 딸을 키우며 바빴다. 어머니는 멀리서나마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우리 애미들이 고생이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이었다. 자신이 며느리였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 직장과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며느리들을 보며 어머니는 연민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셨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며느리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대신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된 때였다. 고학력 여성들이 늘어나고, 경력단절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육아휴직제도가 확대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려는 정책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60대 어머니 세대에게는 여전히 '집안일이 여자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머니도 며느리들이 직장을 다니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집안일과 육아는 여전히 며느리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이중적 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강요하기보다는 "요즘 세상에 여자들 참 힘들게 산다"며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2003년 셋째가 결혼하면서 어머니는 세 번째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셋째네에 하루 머물 기회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는 어머니에 대한 셋째 며느리의 첫 배웅도 인상적이었다.
"저녁에 오셨어서 같이 식사하시고 주무셨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셔서 '됐다 난 아침에 물 한잔만 먹는다'며 물 한잔 드시고 바로 안동으로 내려가셨어요. 며느리 불편할까 봐 서둘러 가시는 모습에서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셋째 며느리의 기억 속 어머니는 세심하고 배려 깊은 시어머니였다. 60대에 접어들면서 어머니는 며느리들과의 관계에서도 한층 성숙해지셨다. 전통적인 시어머니의 권위보다는 상호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추구하셨다.
안동 전통시장에서의 식당 운영도 이제 10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손님을 맞는 일상이 몸에 밴 지 오래였다. 단골 손님들과는 가족 같은 정이 생겼고, 시장의 다른 상인들과도 서로의 사정을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시장 상권은 점점 어려워졌다. 2000년대 들어 대형마트가 생기고, 젊은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온라인 쇼핑이 늘어나면서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단골들을 지켜나갔다. "요즘 세상에 이런 집 찾기 어렵다"는 단골들의 말이 어머니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사장님 음식은 정말 집에서 먹는 맛이에요. 어머니가 해주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뿌듯해하셨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장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한다는 자부심이 있으셨다.
시장의 다른 상인들과도 더욱 끈끈한 관계가 되었다. 특히 비슷한 처지의 60대 여성 상인들과는 서로의 가족사를 나누며 위로받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나이 되니까 자식들 걱정이 제일이야.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게. 손주들 보는 재미로 사는 거지, 뭐."
이런 소소한 대화들이 어머니의 일상에 작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2003년에는 막내가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둘째의 사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네 아들이 모두 자립한 것을 보며 어머니는 뿌듯함을 느끼셨다. 비록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아도,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아들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60대에 접어들면서 어머니의 경제적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 50대에는 둘째와 막내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가 큰 짐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자식들이 사회인이 되어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장 식당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도 이제는 어머니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절약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으셨다. 50대의 치열했던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작은 선물을 사주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정치인이 등장하며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다.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개혁을 약속했고,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정치 참여가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안동은 여전히 보수적이었고,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먼 이야기였다.
2003년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온 나라가 찬반으로 나뉘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오히려 더 관심이 있던 것은 2004년 개통된 KTX였다. 고속철도로 서울까지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안동에서는 여전히 KTX 기차를 타려면 대구까지 나가야 했다.
"세상이 빨라진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느리구나..."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만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받아들임이었다. 60대가 되면서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일상을 더 선호하게 되셨던 것 같다.
2004년 말, 어머니의 60대 초기가 마무리되어 갔다. 한국이 GDP 2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선진국 진입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양극화도 심화되었고, 안동 같은 지방 소도시는 이런 양극화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젊은이들은 계속 서울로 떠났고, 남은 것은 노인들과 전통시장뿐이었다.
하지만 안동 시장 한 켠에서는 더 소중하고 따뜻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라가 경제 성장과 선진국 진입을 꿈꾸는 동안, 60세의 어머니는 할머니라는 새로운 역할을 통해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있었다. 사회가 급속한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동안, 어머니는 변하지 않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자신만의 안정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새로운 기술과 문화에 열광하는 동안, 어머니는 전통적인 정성과 배려로 며느리들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60대 초기의 이야기였다. 새천년의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족 사랑으로 새로운 역할을 찾아간, 가장 따뜻하고 가장 진실한 할머니의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