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새천년의 희망과 시련"
안동 시장 골목길에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2008년 4월, 66세의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셨다. 셋째 며느리가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8개월째였고, 한 달 후면 여섯 번째 손주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전 세계가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의 전조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곧 태어날 손주에 대한 기대가 더 큰 관심사였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며칠 후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온 세계가 경제적 불안감에 떨고 있던 그 봄, 한국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며 "747 공약"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안동 같은 지방 도시에서는 여전히 경기 회복의 기미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시장 상권도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에 밀려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곧 태어날 손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날은 작열하는 태양이 더운 여름날을 더욱 데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시장에서 하루 종일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셋째는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임신한 아내와 다섯 살 첫째 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한 달 후 태어날 둘째 아이에 대한 기대로 힘들어도 버텨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이 어머니의 평범한 일상을 산산조각 냈다. 셋째가 직장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심근경색이었다.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향년 41세, 너무나 이른 죽음이었다.
어머니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0대에 남편을 잃은 아픔도 컸지만, 자식을 잃는 아픔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무너질 수 없었다. 남겨진 며느리와 어린 손자, 그리고 곧 태어날 손자를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
이럴 수가... 아직 젊은 나이에...
어머니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지만,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셨다. 장례 준비를 하면서도 셋째 며느리를 먼저 챙기셨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남편을 잃는 충격이 얼마나 클지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 첫째 며느리인 나의 아내는 지금도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보통 엄마들 같으면 아들이 죽었다면 뒤로 넘어져 정신이 혼미할 텐데, 어머님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장례식 내내 꼿꼿하게 손님들을 접대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라면....."
어머니는 장례식 내내 한 번도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장례 절차를 챙기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에 집중하셨다. 마치 자신의 슬픔은 뒤로 미루고, 남겨진 가족들을 챙기는 것이 먼저라는 듯이.
셋째가 세상을 떠나면서 셋째 며느리는 어머니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홀어미가 되어야 했다. 임신 중인 몸으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곧 태어날 아이와 다섯 살 첫째 아들을 혼자 키워야 하는 현실. 어머니는 그 며느리를 보며 자신의 50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경험했던 50대의 홀로서기와는 상황이 달랐다. 어머니는 48세에 과부가 되었지만, 그래도 아들들이 모두 고등학생 이상이었다. 반면 셋째 며느리는 갓난아기와 다섯 살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막막할까... 나보다 더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셋째 며느리를 보며 깊은 연민을 느끼셨다. 자신도 홀로서기의 고통을 겪어봤기에, 그 며느리의 앞날이 얼마나 험난할지 누구보다 잘 아셨다.
한 달 후 태어난 둘째 손자는 유복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아이. 어머니는 그 아이를 보며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여섯 번째 손자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이 아이가 아버지 없이 자라야 한다는 안타까움.
"고맙다, 고맙다..."
셋째 며느리가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어머니가 하신 말이었다.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며느리의 앞날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멀리서나마 셋째 며느리를 돕고 싶어 하셨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66세의 나이에 여전히 시장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기는 어려웠다. 대신 전화로 안부를 묻고, 가끔 용돈을 보내드리는 것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머니는 셋째의 죽음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평소 감정 표현을 절제하시던 성격이기도 했지만, 너무 큰 슬픔은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었다. 대신 셋째 며느리와 손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셨다.
시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셋째 생각이 나셨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 아직 해보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았을 텐데. 특히 갓 태어난 둘째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 가장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왜 하필 그 아이가...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고, 새벽에 일어나 시작하는 하루는 여전했다.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도, 무너져 있을 여유도 없었다. 살아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어머니는 계속 일어서야 했다.
단골손님들이 위로의 말을 건넬 때도, 어머니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고맙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더라고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으셨다. 깊은 슬픔일수록 침묵하는 것이 어머니만의 방식이었다.
2008년 하반기,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며 경제 전반이 불안정해졌다. 1997년 IMF를 겪은 한국은 그때보다는 잘 버텨냈지만, 여전히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안동의 전통시장도 직격탄을 맞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손님들마저 지갑을 더욱 움켜쥐게 되었고, 외식보다는 집에서 해 먹는 경우가 늘어났다. 어머니의 식당도 예전만큼 손님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경제 위기보다 셋째를 잃은 개인적 위기가 더 큰 충격이었다. 온 세계가 경제적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상실감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것보다 사람이 없는 게 더 힘들어..."
어머니는 시장의 다른 상인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시곤 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셨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식당을 운영하며,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특히 셋째 며느리와 손자들을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으셨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어머니는 조금씩 셋째를 잃은 충격에서 회복되어 갔다.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는 상처였지만, 그 아픔을 안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셨다.
셋째 며느리와 손자들에 대한 걱정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명절 때 만나면 어머니는 유독 그 집 아이들을 자세히 살피셨다. 잘 자라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며느리는 혼자서 잘 감당하고 있는지...
"우리 민이(셋째 첫째 아들) 많이 컸네. 아빠 없어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구나."
어머니는 다섯 살 손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며, 아버지를 일찍 잃은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챙기셨다.
셋째의 죽음은 어머니에게 삶의 유한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셨다.
다른 자식들과 며느리들, 손주들에 대한 사랑도 더욱 간절해졌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셨다.
2009년은 전 세계가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 해였다. 한국도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으로 경제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여전히 어려웠고, 특히 전통시장 같은 곳은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식당도 여전히 예전만큼의 활기를 되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서 오히려 작은 것에 더 감사하게 되셨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 남은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이렇듯 60대의 어머니에게 자식과 영원한 이별은 경제 위기보다 더 큰 상실의 아픔이었다. 전 세계가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우려하는 동안, 67세의 어머니는 가족 시스템의 균열을 메우려 애쓰고 있었다. 국가가 경제 회복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동안, 어머니는 상실의 아픔에서 회복하기 위해 남은 모든 사랑을 쏟아내고 있었다. 세계가 새로운 경제 질서를 모색하는 동안, 어머니는 셋째 없는 새로운 가족 질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재정립해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60대 중반의 이야기였다. 예상치 못한 비극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더욱 단단해진 할머니의 슬픔과 사랑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