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새천년의 희망과 시련"
명절 상을 차리는 어머니의 손놀림이 예전보다 조심스러워 보였다. 2009년 추석, 67세가 된 어머니는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유독 둘째 손자만 품에 안고 계셨다. 셋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반, 아버지 없이 자라는 유복자 손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며 선진국 도약을 꿈꾸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관심은 온통 무릎 위의 손자에게 쏠려 있었다. 아마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지금은 떠나고 없는 셋째 아들에 대한 상실의 애통함과 너무나 사무치는 그리움이 커서 그럴까. 그렇게 손자를 붙들고 있었다.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해였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문명이 시작되었고, SNS를 통한 소통 방식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67세의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먼 이야기였다. 오히려 급속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화두가 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시장에서 일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계셨다.
셋째 며느리의 기억에 따르면, 어머니는 둘째 손자를 유독 아껴하셨다. "어머님이 아들만 너무 이뻐하시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도 생길 만큼"이었다고 한다. 명절 때 모든 손주들이 모이면 그 차이는 더욱 명확해졌다.
손자가 오면 어머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며 껴안고 얼굴을 비비는 행동을 하셨지만, 손녀들에게는 그런 적극적인 애정표현이 적었다. 특히 아버지를 일찍 잃은 둘째 손자에게는 더욱 각별한 사랑을 보이셨다.
"우리 찬이 왔나..이 할미가 많이 사랑한다..."
어머니는 셋째의 둘째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다른 손주들이 보는 앞에서도 서슴없이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셨다.
너무 젊은 날 떠나 버린 셋째에 대한 상실이 이들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듯했다. 지나가는 투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딸들은 시집가면 남의 집안 식구된다. 시집가면 그만이다."
이런 얘기은 분명 손녀들에게 서운했을 것이고, 며느리들도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가치관이었다.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자란 어머니 세대에게 아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속으로만 갖고 계시지.. 굳이 밖으로 표현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
나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시대가 변해서 남녀평등이 당연해진 지금, 어머니의 남아선호 의식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머니 세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67세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기대나 체면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더 충실해지셨던 것 같다. 좋은 것은 좋다고, 예쁜 것은 예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지셨다. 비록 그것이 다른 가족들에게는 서운함으로 다가왔지만, 어머니 나름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었다.
자식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어머니의 사랑 표현도 달라졌다. 직접 곁에서 챙겨줄 수는 없지만, 전화 통화를 통해 안부를 묻고, 명절 때 만나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많이 잘 컸네... 건강하게 잘 커야 한다..."
손자 손녀들이 클 때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기뻐하셨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자주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명절 때의 만남으로 달래셨다.
특히 셋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집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각별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어떻게 클지, 며느리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지 늘 마음에 두고 계셨다.
첫째 며느리가 직장과 육아로 힘들어할 때도, 둘째 며느리가 두 딸을 키우며 바쁠 때도, 어머니는 멀리서나마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직접적인 도움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고생이 많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우리 애미들이 요즘 세상에 참 힘들게 산다..."
어머니는 시장의 다른 상인들과 대화할 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며느리들이 직장과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현실을 이해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셨다.
전화 통화도 어머니만의 사랑 표현 방식이 되었다.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목소리로나마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셨다. 특히 손주들의 근황을 들을 때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우리 손주들이 공부 잘하고 있다며? 착하게 잘 크고 있구나..."
이런 대화들이 어머니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족들이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소식만으로도 충분했다.
셋째의 죽음은 어머니에게 삶의 유한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셨다.
다른 자식들과 며느리들, 손주들에 대한 사랑도 더욱 간절해졌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셨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살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을 더욱 깊게 하셨다. 특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자식들의 건강과 안전이 늘 마음에 걸리셨다.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이면, 어머니는 한 명 한 명을 더욱 자세히 살피셨다. 살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거리는 없는지... 예전보다 훨씬 세심하게 챙기셨다.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어머니의 가치관도 더욱 단순해졌다. 성공이나 출세보다는 건강과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셋째를 갑작스럽게 잃은 경험이 어머니의 가치관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편애도 더욱 강해졌다. 특히 아버지를 잃은 둘째 손자에 대한 사랑은 다른 손주들과 확연히 구별될 정도였다. 그것이 다른 가족들에게는 서운함으로 다가왔지만, 어머니에게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어머니의 시장 생활도 거의 20년에 가까워졌다. 6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손님을 맞는 일상을 계속하셨다.
하지만 체력적으로는 예전 같지 않으셨다. 오래 서 있기가 힘들어지셨고, 무거운 것을 들기도 어려워지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으셨다.
"일을 안 하면 몸이 더 안 좋아져. 움직이는 게 약이야."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계속 일하셨다. 실제로 일을 하실 때의 어머니는 더 생기가 있어 보였다. 단골손님들과의 대화도 어머니에게는 중요한 사회적 접촉이었다.
시장의 다른 상인들도 이제는 대부분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대가 되었다. 함께 늙어가는 동지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의 건강을 챙기고, 가족 소식을 나누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는 관계가 되었다.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
"그래도 건강해서 다행이야. 일할 수 있는 게 감사한 거지."
이런 대화들이 어머니의 일상에 작은 위안을 주었다.
2011년, 어머니의 60대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69세가 된 어머니는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할머니의 역할을 완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역할에는 분명한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
어머니의 남아선호 의식과 편애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솔직해지셨다. 손자들에게는 표현과 동작이 큰 반면, 손녀들에게는 다소 적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서슴없이 하셨다. 며느리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편애는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만의 따뜻함과 정도 있었다. 비록 편애는 하셨지만, 모든 손주들을 나름대로 사랑하고 계셨다. 다만 그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며느리들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시어머니의 권위를 고집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며느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고맙다", "미안하다"를 반복하는 어머니의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60대는 그렇게 상실과 사랑이 교차하는 복잡한 시간이었다. 셋째를 잃은 깊은 슬픔과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더 깊어진 사랑, 전통적 가치관의 고집과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함께 공존하는 시기였다.
2011년은 한국이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해였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했고, 스마트폰과 SNS의 확산으로 세대 간 소통 방식도 급변했다. 젊은 세대들은 디지털 네이티브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69세의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낯선 세상이었다.
하지만 안동 시장 한 켠에서는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었다. 국가가 고령화 대책을 고민하는 동안, 어머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년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었다. 사회가 새로운 소통 기술에 열광하는 동안, 어머니는 가장 오래된 소통 방식인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있었다. 세상이 평등과 공정을 외치는 동안, 어머니는 편애라는 솔직한 감정을 통해 자신만의 사랑의 철학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60대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상실 속에서 더욱 깊어진 사랑과 시대적 한계를 안고서도 변하지 않는 할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한, 가장 솔직하고 가장 인간적인 사랑의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