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을 살고 싶니?

산 둘레길에서 어린 시절과 조우하다

by 호모 비아토르

오랜만에 동네산을 등산한다. 100미터가량의 나지막한 산 중반 정도를 오르면 둘레길이 나온다. 둘레길을 나의 속도에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중간크기의 돌이 길 사이사이에 있어 조심스레 돌 사이를 비집고 걷다가 문득 오른쪽 등산화 끈이 풀린 것을 발견했다.


바로 바위에 앉아서 오른쪽 등산화 끈을 매고 있는데....

그때였다. 내 눈앞에 있던 흙, 풀, 나뭇가지가 확대되어 보인다. 그 순간 자그마치 7세.. 6세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마치 하나의 상황을 통해 또 다른 세계의 통로가 열리는 느낌이다.

흙, 풀, 나뭇가지가 잠자고 있던 과거의 어린 시절을 재연시킨 것이다. 현재의 산 둘레길에서 갑자기 강원도 어느 산골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풍경은 깊고 깊은 산골이었다.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산과 들, 숲, 개울가에서 풀, 나뭇가지, 돌을 이용해서 놀았다. 자연이 내 놀이터였고, 삶이 자연이었다. 나무를 올라타다가 떨어지기는 일쑤였고 풀에 베이고 흙바닥에 넘어지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는 아파도 누군가 다가와 일으켜주거나 치료해 줄 사람이 없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주고 부모님은 어딘가 밭일을 하러 나가셨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동네아이들과 무리 지어 우리만의 세상 속에서 살았다. 푹신한 낙엽 속은 편한 이불속이었고 그 속에 있을 벌레로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자연은 어떠한 제한도 없는 상상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다.


언제나 자연 속에 안겨 있었고, 내 속에 자연이 들어와 있었다. 자연을 빼고는 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내게 냉이, 쑥, 달래 등을 주었고, 과일을 구경하기 힘든 산골에서 앵두, 개자두, 머루, 다래, 오디, 돌배 등을 마음껏 먹게 해 주었다. 때론 갖가지 벌레등의 위험이 도사리기도 했지만 자연이 주는 풍족함이 커서인지 그 위험은 일부분 일뿐 큰 방해거리가 되지 못했다. 지금의 아이들처럼 공부를 하라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오늘 하루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까?를 고민했다.


하루 종일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은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부엌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신나게 부엌으로 향하면 부뚜막 아궁이에 불이 피어져 있었고 가마솥에 뭔가가 끊고 있었다. 이미 내 손과 발, 얼굴은 때구정물이 잔뜩 묻어있어 안 그래도 까만 얼굴이 더 까만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놀고 나서의 피로를 뒤로 하고 그날에 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기대한다. 그때는 무슨 반찬인지를 기다리기보다 그저 엄마가 해주는 밥 한 끼가 마냥 좋았다.


그때 기억을 엄마에게 꺼내면 “그때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그 외딴 시골에서 농사일을 사람 손으로 다 했어. 지금은 다 기계로 하지만 말이야. 정말 말하기 싫을 정도로 고생했어. 도시로 나오기 정말 잘했지.”라고 말씀을 하신다. 나의 시선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자연풍경일지 몰라도 엄마에게는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된 노동의 현장이었고 세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한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어린 왕자 중에서


오늘, 현재 시점에서 과거와 만나 조우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어느덧 다 큰 성인이 되었지만 내 속엔 6,7세 때 자연 속에 뛰놀던 여자아이가 있다. 그 여자아이는 지금도 그때 자연 속에 뛰놀던 그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 여기에서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을 탐색하며 방황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 자연에서 놀잇감을 찾아 산, 들, 숲을 헤치고 다닌 것처럼 말이다. 때론 위험한 뱀을 만나기도 하고 넘어져 다쳐 피를 흘릴 수 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다친 상처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재미있는 놀잇감을 만나 시간가는걸 잊은채 신나게 논다.

그날의 감정과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내 몸에 DNA처럼 장착되어 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축적된 경험은 세월이 흘러도 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를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 하는 놀이터처럼 살아가고 싶다. 사회 속에서 때론 나의 감정을 숨기고 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상황에서도 묻혀가듯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게 진짜 나일까? 의심할 때도 있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가면을 바꿔 써 가며 사회에 적합한 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일 때 행복한지를 말이다.


지난 시절 그렇게 자연 속에서 순수하게 뛰놀던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내면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시골스러움이 내재되어 있다. 삶에서 회색구름을 만난다. 갑자기 하늘이 찌푸려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다. 그때 우산이 되어주는 어린 시절 감성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일상의 틈 사이로 잠깐의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는 명랑함과 유머이다. 인생은 때론 쓰고 아프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괜찮다. 오늘도 일상 속에 숨겨진 신비를 발견하고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숲 속을 헤치며 다녔던 그녀가 오늘도 삶의 숲 속을 헤치며 삶에 일상여행을 떠난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떤 삶을 살고 싶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