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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거북이가 깨뜨린 인간의 선

<우리를 아십니까>를 읽고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中)

by 책 쓰는 여우
이혼하기 싫어서 스스로 죽어버린 아내와 내가, 거북이를 바다에 방생한 기록을 담았다

더 짧게는 좀비가 된 두 여자와 거북이의 기록이다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은...'을 물으며 시작하는 책이지만 이름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 글은 왜 그랬는지에 대해 나름의 이유를 적어 보았다.

줄거리 요약
16년 전 졸업식 날에 간호사인 주인공에게 아내가 프로포즈를 했다. 그 이후로 주인공의 꿈은 결혼을 하는 것뿐이었다. 결혼하고 싶어도 나라에서 안 된다고 '개지랄'을 떨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결국 아내와 결혼해 아주 애틋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은 암에 걸려서 죽고 있었다. 주인공이 혼수상태에 빠진 사이 좀비 바이러스가 (천선란 작가께서 좀비를 매우 좋아하신다) 퍼져서 아내와 주인공 둘 다 물린다. 이후 주인공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아내가 남긴 녹음기로 아내의 말을 들으며 자기 병원의 수족관에 살던 거북이 장풍이를 방생하러 간다.


올리브각시바다거북이

요즘은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동물권을 보호하고, 다쳐서 야생으로 못 돌아가는 동물만 사육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나머지 경우는 사실상 동물들을 자연에서 납치해 온 것이다. 병원 수족관에서 살던 장풍이는 올리브각시바다거북이다. 많이 포획도 되고 버려지기도 하다가 멸종위기종이 된 종이다. 그래서 말하는 거북이 장풍이는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저 새가 뭔데?

흔히 볼 수 없는 부리 붉은 애. 잘 날고, 많이 먹어.

아니, 종이 뭐냐고 새 중에서도 비둘기나 학, 두루미, 이런 거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건 우린 몰라. 분류하고 나누는 건 인간만 해. 재는 그냥 많이 먹고, 한동안 안 보였어. 기온이 엉망이라 길은 못 찾는다고 들었어. 예민한 애야. 종을 알아야만 저게 있다는 걸 인정할 거야? 모르면 재는 존재하는 게 아닌 거야?

너는 올리브각시바다거북이야.

나한테 필요 없는 정보야. 알려주지 마. 기억하지 않을 거아. 기억하면 외로워져.

왜?

네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으면, 나는 언젠가 저 예민한 애처럼 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어. 내 몸은 나른할 맨 숲이 되기도, 헤엄을 칠 땐 파도가 되기도 해. 등을 말릴 땐 바람이 되기도 하지. 나는 자유자재로 변하고, 속하고,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구분 지으면, 선이 생겨. 넘을 수 없는. 내가 갇혀 있던 가짜 바다의 투명한 벽처럼. 선이 생기면 오래 살 수 없어. 넘을 수 없다는 좌절이, 마음을 늙게 해.

그게 너희의 장수 비결이야?

아니. 이게 원래 지구를 살아가는 방법이야.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MBTI다. 과거에 MBTI가 많이 유행했을 때 가끔 진지하게 T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은 선을 만드는 것이 본능인가 보다. MBTI이전에는 혈액형 성격이 있었고, 미국에도 별자리 성격이 유행한다. (물론 대부분은 재미로만 하는 것이니 문제되지 않지만)


그리고 생각난 것은 인종차별이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도 인종차별이 있는 나라다. 아주 심각한지는 모르겠지만 존재는 한다. 뉴스에서 관련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고 잘 사는 나라에서 왔는지 못 사는 나라에서 왔는지를 따진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1. 우리나라도 가난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지 않았고 2.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성장한 것이다. 혹시라고 저도 모르게 차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부터 거북이의 말을 기억하자.


숨겨진 선
내가 이 글의 메인 주제라 생각하는 것은 퀴어다. 주인공은 여자고 레즈비언이다. 결혼을 허락하지 않던 나라는 현재 우리나라이다. 그걸로 차별을 많이 당해왔는지 소설 초반에 호텔에 들어갈 때 혹시 자신들을 커플이라 생각을 안 하는 거 아니냐며 예민한 모습을 보였다. '개지랄'도 이 책에서 유일하게 욕을 하는 장면이다. 평소에 착한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낼 때가 가장 무서운 것처럼, 주인공도 쌓인 것이 많았나 보다.

학교에서 누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선생님은 그 학생을 세게 꾸짖으실 것이다. 하지만 '너 레즈냐', '게이 같아' 같은 말은 뭐라 안 하시고, 오히려 선생님들이 먼저 그런 말을 하시기도 한다. 아무도 고려해보지 않는 사실은 혹시나 그 반에 진짜로 게이인 친구가 있으면 상처가 될 거라는 것. 과거 학교에서 대놓고 가난으로 차별한 것, 인종으로 차별한 것과 같이 미래에는 게이를 이상하게 보는 것을 차별적이던 과거로 보지 않을까.

주인공이 질문을 하고 장풍이가 반박하는 식이였지만 주인공도 장풍이의 대답을 들으며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너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야"라는 메시지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거북이에게 질문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론
질문으로 돌아와 보면, '우리의 이름'을 고민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바다거북에게 '우리'는 가끔 아쿠아리움에 놀러 왔고, 점점 좀비로 변해가고 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조금 예민하고, 자신을 바다로 돌려보낼 책임감 정도는 있는 인간일 것이다. 이렇듯 사람을 수식하는 데 바다거북은 많고 다양한 표현을 쓰지만, 누구는 그냥 '레즈커플'로 축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는 순간 '넘을 수 없는 선'이 생기고, 선이 생기면 넘을 수 없다는 좌절이 마음을 늙게 한다.


선을 긋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듯 하다. 하지만 그 선을 능동적으로 없애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인간이다.

에필로그
올해 여름방학 때 사게 된 책이지만 첫 번째 소설인 김초엽의 <비구름을 따라서>만 읽고 지금까지 덮어뒀었다. 이렇게 재밌는 책을 이제야 읽게 됐다니. 책을 서점에서 살 때는 이게 판타지 소설인지도 모른 채 표지에 끼어있는 종이에 크게 김초엽(지구 끝의 온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천선란(천 개의 파랑) 적혀 있어서 충동적으로 샀다.


비유를 정말 잘 쓰신다. 뇌종양이 끼어서 주인공이 기억을 잘 못하는 장면을 "기억은 드문드문하다. 시골 밭, 1차선 도로에 띄엄띄엄 세워진 가로등 같다. 가로등 아래에는 연극 무대 위에서 동작을 멈춘 배우들 같은 인물들이 서 있다."라고 쓴 것을 보고 빨리 작가의 다른 글도 봐야겠다 싶었다. 여기에 존엄사, 환경오염과 같은 주제도 있었고, 좋은 글귀가 있을 때마다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놓다 보니, 책 옆면에 포스트잇이 너무 덕지덕지 붙어 있게 되었다.

게이나 레즈나 이성애자나 다를 것 없고, 그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사랑을 하고 싶을 뿐이다. 혹시 우리 주변에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깨뜨릴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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