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by Iasqua

“네가 지금 나랑 같이 자퇴하고 서울로 대입준비하러 떠나지 않을거면 이게 너와 수능 전 마지막 만남이 될거야“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서울에서 오로지 나만을 만나기 위해 내려왔다던 A는 나와 마지막 사진을 찍더니 저렇게 말하고는 영영 고향을 떠났다.


A와 나는 중학교 시절 치열하게 공부했다. 정말 인생 첫 라이벌이자 함께 특목고를 목표로 공부하던 전우였다. 성적도 비슷했던 A와 나는 비슷한 이유로 특목고를 포기하고 일반고로 진학했다. 그리고 목표의식을 잃고 번아웃이 와버린 나와는 달리, A는 일반고에서 시답지 않은 우정같은거에 시간낭비하지 않고 대입만 바라보고 싶다며 자퇴하고 서울 명문 기숙학원행을 택했다.


번아웃이 와서 한창 방황하던 시절에 일본드라마 ‘롱 베케이션‘을 봤었다. 수많은 일본드라마를 보던 시절이었는데 지금까지도 뇌리에 박혀있는 드라마다. 거기에 보면 여주가 언제쯤 내 차례가 되는걸까 대체 뭐하고 있는걸까 하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남주가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분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뭘 해도 잘 안될때가 있지않느냐고 뭘 해도 안되는 그럴때. 그럴때는 신이 주신 긴 휴식(long vacation)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럴때는 무리하지 않는다 초조해하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 흐름에 몸을 맡긴다 라고.


이 대사가 당시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고 A를 불현듯 떠올리게 했다. A 넌 이런 대사가 주는 위로따위 필요없이 승승장구하겠지? 지치지 않고 안풀린다는 생각 따위 할 일도 없을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이 생각이 틀렸다는 건 오래 지나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수능을 치고 나는 A가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재수학원에서 A를 마주친 다른 친구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A는 원년에 수능을 말도 안되게 망쳤고 재수를 시작했으나 그 또한 제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해 삼수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더 놀라운건 이 후에 그 삼수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아 말도 안되는 지방대 의대를 진학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던 아이였고 그래서 더 자신에겐 노력한만큼 결과는 반드시 온다는 자신감 넘치던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뭘 해도 안되는 때는 있는건가. 두려웠다. 그런 때가 오지 않게 난 A보다 더 노력하며 살아야 되는건가 그렇게 살 수 있나 무서웠다. 그리하여 나는 그렇게 인생을, 청춘을 묘한 긴장감과 불안함을 바탕으로 한 선택과 노력으로 지나오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 역시도 결국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뭘 해도 안되는 시기들을 맞이했다. 피할 수 없는 누구에게나 오는 필연적인 시기라는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절망적으로 괴로워하지도 벗어나려고 아둥바둥 발버둥 치지도 않았을텐데.


긴 휴식. 결국 그건 기다림이었다. 분발해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안되는 때를 견디고 버텨내는 기다림에 대한 위로의 다른말이었고, 그런 시기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버텨내게 하는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란 결국 내가 나에게 주는 시간에 대한 관용이었다. 그리고 기다림의 끝은 결코 망함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 있었을 뿐.


시간이 더 흐르고 A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그간 힘들게 지나오던 시기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결국 서울대 대학원까지 진학한 이야기들까지 모조리 들려줬다. A도 알았을까. 내가 일본드라마에서 봤던 그 대사 속의 진리를 A도 인생을 관통하며 느꼈을까.

물어보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거라 확신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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