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화를 내지 못하는 이유

나를 지키려던 거친 경호원의 고백

by 그대로 박희룡

살다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발끝부터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그리 대단한 일 때문도 아니었다. 무심코 던진 날카로운 말 한마디, 내 노력과 시간을 무시하는 태도가 시작이 되곤 하였다. 그럴 때면 심장은 터질 듯 요동치고, 당장이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마치 조용했던 감정들이 일제히 깨어나 나를 힘들게 하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무감각한 시간을 지나, 이제는 감정이 넘쳐흐를 것 같은 위험한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화를 내는 것이 성숙한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감정을 세련되게 잘 조절하는 게 곧 교양이며, 화를 터뜨리는 건 인내심의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화가 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그 화를 억지로 꾹 참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고, 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생각으로 상황을 피하곤 했다. 그렇게 참는 것만이 어른스러운 행동이라 믿으며 나 자신을 속여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참은 화는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억눌려 남아있은 분노는 가장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엉뚱하게 터져 나오곤 했다. 밖에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던 내 모습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참아온 분노는 결국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아프게 할 뿐이었다.


이제 나는 화가 날 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예전처럼 화가 날 때마다 곧바로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거나 입을 꾹 닫고 숨어버리는 대신, 내 안의 뜨거운 감정을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화가 날 때 ‘내가 지금 아주 많이 화가 났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만으로도 화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나쁜 기분이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가만히 뜨거운 분노 곁에 머물다 보니, 화라는 거친 모습 뒤에 숨은 진짜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는 절대로 혼자 오지 않는다. 거친 기분 아래에는 언제나 화보다 더 깊고 연약한 감정들이 겁을 먹은 채 숨어 있었다. 화의 정체는 사실 ‘무시당했다’는 서운함이었고, ‘이해받지 못할 것 같다’는 외로움이었으며, ‘내 노력이 헛수고가 될까 봐’ 느끼는 깊은 두려움이었다. 밖으로 터져 나온 화는 사실 내 안의 약한 감정들이 자신을 지켜달라고 보내는 간절한 신호였던 것이다.


화는 상처받기 쉬운 내 연약한 마음을 지키려 가장 먼저 달려오는 거친 경호원 같았다. 마음이 더는 다치지 않도록 나 대신 큰 소리를 지르고, 상대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더는 나를 건드리지 마!”라고 소리치는 경호원의 모습은 위협적이지만, 그 뒤에 숨은 진짜 마음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못한 채 홀로 외로이 울고 있었다. 나는 나를 위협하던 그 거친 모습이 사실은 나를 지키려 했던 절박한 몸부림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비로소 화를 내는 나를 비난하는 대신, 안쓰럽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지키려고 저토록 애를 쓰고 있었구나, 오죽 아팠으면 저렇게 화난 표정을 짓게 되었을까 싶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나는 분노의 뜨거운 기운 속에 머물며 나 자신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그토록 지키고 싶어서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니?”


이 질문 끝에 뜨겁던 화가 조금씩 식으며, 그동안 애써 감춰온 진심이 조심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네가 내 수고를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랐어.” “그저 내가 여기서 소중하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을 뿐이야.”라는 이 솔직하고도 가냘픈 소리를 듣는 순간, 나를 괴롭히던 화는 더 이상 남을 공격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제발 나를 더 사랑해 달라고, 나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 달라고 외치는 나 자신의 간절한 부탁이었던 것이다.


흔히 화를 다스린다고 하면 그 화를 억누르거나 없애는 기술을 떠올릴 수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다스림은 화를 참는 것도, 아무 때나 터뜨리는 것도 아니다. 화가 난 순간 잠시 멈춰 서서, 그 뜨거운 기분 아래에 어떤 상처가 숨어 있는지 찬찬히 살피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던지기 전에, 내 안에서 떨고 있는 연약한 마음을 먼저 안아주는 일이다. “많이 속상했지? 존중받지 못해서 참 많이 아팠구나.” 이렇게 나 자신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밖을 향해 날카롭게 세웠던 공격적인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물론 나는 여전히 화를 낸다. 무례한 태도 앞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다. 가끔은 화를 참지 못해 후회할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화가 난 나를 자책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화라는 거친 기분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길 묵묵히 기다리며, 그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나의 솔직한 진심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어떤 부분에서 여전히 아파하는지를 어제보다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화는 나를 망가뜨리려 찾아온 나쁜 유혹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어 하는, 내 안의 가장 솔직하고 뜨거운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 뜨거운 기분 속에 머물며 나의 진짜 마음을 발견하는 연습을 통해, 나는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연습하면서 배우다 보면 나 자신과의 관계는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화라는 뜨거운 감정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내가 가장 먼저 보살피고 닦아주어야 할 소중한 나 자신이 홀로 거기에 서 있었다.


지금 마음속에 참기 힘든 화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 화를 애써 끄려고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그 뜨거운 기분이 전하는 메시지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 당신이 그토록 화가 난 이유는 어쩌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싶기 때문이며, 당신의 삶이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리고 있는 셈이다. 화의 기운 속에서 진심을 만나는 순간, 그 힘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지켜내는 든든한 빛이 되어줄 것이다.


화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더 존중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는 솔직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뜨거운 기분조차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비로소 화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안의 화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정직한 빛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화가 지나간 자리의 평온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나를 지키느라 참 고생했다.”라고 속삭이며 가만히 안아준다. 그 한마디가 세상의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어 내 마음을 다정하게 달래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가슴 한구석이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움을 느끼면서도, 그 화가 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 억지로 참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화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될지, 아니면 내 삶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될지는 오직 그 기분 속에 얼마나 솔직하게 머무르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그 기분 속에 잠시 멈춰 서서 내 마음이 보내는 간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도 눈물겨운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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