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연애
아무래도 중,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가장 큰 화두 중에 하나는 연애인 것 같다.
하긴,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으니.
연애에 관대하신 부모님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학생 때의, 그것도 고등학생 시절의 연애에 대해 반기지 않으신다.
대입에 몰두해야 하는 시기에 상대방에게 자칫 공부에 필요한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릴까 하는 노파심과 혈기왕성한 아이들이기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걱정도 있을 터.
그럼에도 수많은 아이들은 연애를 하고, 나 또한 그들의 연애를 지지한다.
물론, 내 상식에 납득이 가는 한에서만.
오늘은 듣고도 믿기 힘들었던, 그냥 그들의 입으로 지어낸 소설이기를 바랐던 연애 이야기 중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2. K의 비밀 연애
K와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중학교 2학년인 시절이었다.
매일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나름 착실하게 숙제를 해오는, 쉬는 시간의 꿀 같은 수다를 항상 기다리는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K는 특히나 어른인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연애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또래 남자아이들은 재미가 없다는 말도 여러 번 했었다.
나이보다 성숙한 연애를 소망하는 일은 나 또한 그 시절에 98번 정도 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K가 중3이 될 즈음, 썸남과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거의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번 꼴로 대상은 바뀌었고,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서로 다른 대상들과의 데이트 일화를 듣는 일이 일상이 되어갔다.
여느 날처럼 열심히 리액션을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하던 도중 문득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근데 K는 그 많은 남자들이 다 한 동네 아이들이야? 아무리 한 학교는 아니라고 해도 같은 동네 친구들이면 나중에 괜히 껄끄럽거나 그러지는 않을까? 요즘 친구들은 그런 거 없나?"
나의 우려는 그녀의 대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네애들 아니에요. 다 오빠들이고 인스타 DM으로 연락 와서 만나는 거예요. 지금 만나는 오빠는 대전 살아요, 전에 만나던 사람도 지방사람이었고요"
손가락 하나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연애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지만, 이 어린아이가 그렇게 전국구의 연애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을 못했기에 조금 충격이었다.
더불어 인스타로만 연락을 주고받다가 사귀고 그를 만나러 중간지점까지 간다는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짐짓 놀라지 않은 척을 하며 간결하게 내가 걱정되는 부분만 말했다.
"연애라는 게, 그리고 너희 나이의 연애라는 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를 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인스타 사진이랑 쪽지로만 주고받던 사람이랑 쉽게 사귀고 하는 건 선생님 입장에서는 조금 걱정되는 게 사실이야. 잘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성급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신중하면 더 좋고"
알겠다고, 걱정 말라고 말했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처 상상하지도 못한, 어쩌면 가장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저지른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성인과의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대상이 중3 여자아이와 27살 성인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그들의 연애를 알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수업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아이는 4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사전에 연락은 있었다.
문제는 집에 계신 할머니께 말씀드린 사정과 내가 알고 있는 지각의 사유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께는 학교에서 늦는다고 둘러대고, 나에게는 '외부인 주차등록 관계로 커뮤니티 센터에 와있는데 줄이 너무 길어 늦어지고 있다는'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밖에서 놀고 늦게 들어오는구나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길 40분, 다소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아이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만남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온 얼굴에 번진 립스틱.
정말 입술 빼고 온 얼굴(목을 포함하여)에 립스틱 번진 자국이 있었다.
거울도 안 보고 나온 건지 죄송하다며 환하게 웃는 아이에게 나는 더 이상의 할 말을 잃었고, 쉬는 시간에 조용히(혹여 할머니가 들으실까 싶어서)
"너 남자친구 만나고 왔지" 물었다.
"(잠시 정적 후에) 어떻게 아셨어요....?"
묻는 그녀에게 나는 거울을 보여주었고 화들짝 놀란 K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이보다 10살이 많은 남자친구는 역시나 인스타로 소통을 하게 되었고 그가 일을 쉬는 날마다 아이를 만나러 오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자신을 잘 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에게 K는 삽시간에 마음을 빼앗겼고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애를 시작했단다.
본래 아는 사이였대도 10살이 많은 오빠와 사귀게 되었다고 하면 고민이 되는 판국에, 당시 나와 또래인 남자와 중3 아이가 인스타로 만나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우려로만 다가왔다.
"27살이면 남자애 직업은 있니? 공부하는 학생이야?"
"아, 오빠는 ㅅㅅ에 다녀요!"
오잉, 이것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ㅅㅅ맨이었다니.
직업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아주 조금 마음이 놓였다.
"ㅅㅅ다니는 사람이 주중에 이틀이나 쉬면서 너를 만나러 온단 말이야? 정성이 대단하네"
"아, 오빠는 ㅅㅅ전자 서비스센터 매장에서 핸드폰 팔아요^^"
하.... 순간 이 아이의 순수함에 할 말을 잃었다.
엄밀히 보면 틀린 말은 하나 없지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다는 나름의 기발함에 말 문이 막혔다.
뒤이어 쏟아지는 해맑은 그녀의 말.
"근데 이제 ㅅㅅ나와서 ㅋㅍ으로 간대요"
"아 그럼 이제 취업하는구나!"
"어? 전에 ㅅㅅ도 직원이었고, ㅋㅍ도 마찬가지예요. 물류센터에서 일한다던데요? 거기가 돈 더 많이 준다고요"
"................."
K의 지론에 따르면 이 세상 어른의 80% 이상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을 터였다.
(대학생 시절 알바몬이었던 나는 거의 대기업 순회를 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 그래도 쌤한테 이런 얘기해 줘서 고맙고, 쌤이 어른으로서, 니 남자친구랑 또래로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혹시나 부모님께 말 못 할 일이 있으면 쌤한테라도 말해줘"
이게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 그녀를 만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그녀가 가출을 한 것이다.
다행히 하루이틀 만에 돌아왔고, 역시나 그의 집에 가 있었단다.
"오빠가 집에 있기 싫으면 자기 집으로 오랬어요. 어른들 눈 피해서 저녁이나 새벽에요. 자기가 택시비 주겠다고"
이제 더 이상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이의 부모님도 그의 정체를 알게 되셨고, 큰 상심과 충격에 빠지셨다.
아이는 왜 자신의 남자친구가 성인이라는 이유로 박대를 받는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믿음직스럽고 멋지다고 말했다.
어른과 아이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다시는 가출을 하지 말라고 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아 아이는 또 가출을 했다.
그 사이, K의 화장과 옷도 달라져갔다.
"남자친구가 치마를 좋아해요. 힐이나 치마를 안 입으면 화내고 자기를 안 좋아하는 거냐면서 뭐라고 해요. 저번에는 친구 보고 바로 만나느라 운동복을 입었는데 왜 이렇게 입고 나왔냐고 하더라고요. 머리도 묶지 말고 꼭 푸르고 다니라고 하고"
그래도 나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K였기에, 그 자체가 다행이다 생각하며 자칫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머님께 상의를 드려야겠다 싶었는데 그 경계가 참 애매했다.
함부로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녀와 나의 수업은 K의 두 번째 가출로 종강을 맺게 되었는데, 가출 직전의 수업에서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충격이었다.
"쌤은 여자 혼자 아기를 낳아 기르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발, 이런 주제는 올라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놀랐지만, 일단 상황 파악을 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엄청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 사실은 너랑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쌤은 불편하고 걱정되는데,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야?"
"생리를 안 해요...."
"임테기는 해봤고?"
"사기가 무서워서 못했어요"
"쌤이 사다 줄까?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사서 해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에서는 온갖 분노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일단 아이가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자친구한테 사달라고 해. 남자친구한테도 말했을 거 아냐"
"남자친구는 몰라요. 말 안 할 거고요. 괜히 이런 말 꺼냈다가 싸울 것 같아요.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혹시나 임신이면 저는 혼자 낳아서 기를 거예요. 찾아보니까 미혼모 지원해 주는 센터 같은 곳이 있다던데 그런 곳 들어가서 살면서 일하면 돼요. 알바 사이트 보니까 ㅅㅈ떡볶이 같은 곳은 돈 많이 주던데요?!"
이런 얘기를 들은 이상, 그날은 수업이고 나발이고 일단 지금 K가 혼자서 얼마나 멀리, 위험한 곳까지 가있는지 알려주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남은 수업 시간 내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을 말했다.
"지금 네가 하는 생각은 절대 혼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야. 일단 임테기를 해보고 빠른 시일 내에 부모님께 말씀드려. 네가 안 하면 내가 하는 수밖에 없어. 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주말까지는 말씀드려"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던 그녀는 그 주 주말에 가출을 했다.
아이가 첫 번째 가출을 하고 집에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던 날, 나는 물었었다.
"쌤이 보기에 K는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잘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에 결핍을 느껴서 가출까지 하는 거야?"
돌아온 K의 대답.
"저는 항상 부족해요. 마음이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저는 엄마랑 살았고 엄마는 항상 바빠서 할머니랑만 있어야 했어요. 엄마는 늘 제게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데 저는 진짜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최선은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제가 필요할 때 엄마가 있어주는 거예요. 엄마를 찾을 때 그 자리에서 제 말을 들어주는 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인데 저희 엄마는 항상 바빴어요. 그리고 그게 다 절 위해서 그런 거라는데 제게는 1도 와닿지 않아요"
아무리 어른이라도, 그녀와 같은 환경에 처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쭙잖은 충고를 내리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그저 듣고만 있었다.
"이 오빠는 제 얘기를 들어줘요. 중간에 끊거나 자기 말만 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줘요. 공감도 해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게 그렇게 나쁜가요? 어른들은 몇 살이 차이나든 자기가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애가 있어도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면서 왜 저는 안 돼요?!"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려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남지만 그때는 알겠다고, 만나는 건 그렇다 치고 가출은 하지 말라고만 말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수업은 중단되었고, 이후에 듣게 된 이야기로 어머니는 심리치료와 각종 종교의 힘으로 버티시면서 결국 아이의 남자친구를 고소했고 법정 다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임신이 맞았던 건지, 그 후에 또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아이는 현재 집으로 돌아와 직업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출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울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7년간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며 얻은 것으로 말미암은 바람은 '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내 아이가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자는 것'이다.
이건 내가 추구하는 배우자상과도 부합하는 부분인데, 아무래도 그만큼 소통에 있어 '경청'이 중요한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요새도 자주 바뀌는 K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목말라하던 존재의 갈증이 조금이라도 해소되었기를.
이제 다른 사람이 채워주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공백을 채우는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