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
나는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안돼”라고 말한다. 밑도 끝도 없는 여행무새의 입을 안 된다는 단어로 막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인스타그램 비행기 아이콘에는 그가 보낸 수많은 릴스가 쌓여 있다. 콘텐츠의 종류는 그의 머리 스타일 후보, 귀여운 동물들 그리고 여행이다.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귀여운 고양이, 강아지는 놓칠 수 없으니 확인 후 DM 창을 나간다.
“내가 보낸 릴스 봤어?” 숙제 검사를 하듯 확인 유무를 묻는 그에게 천연덕스럽게 다 보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사실 보지 않았다. 여행 이야기를 시작할까 봐 그가 보낸 귀여운 강아지 이야기를 급히 해본다. 그는 짧게 공감한 후 애석하게도 바로 여행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여행 제의는 과연 모두 진심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다음에 밥 한번 먹자고 하는 그런 기본적인 인사치레인 것일까. 본인은 아니라 하지만 정말 속마음이 궁금하다. 강릉과 부산, 포항 등 국내는 기본이며, 은하수가 펼쳐진 아이슬란드, 그림 같은 자연의 뉴질랜드, 떠오르고 있는 도쿄의 근처 소도시 등 지구 한 바퀴는 돌 수 있을 것 같은 여행 후보지가 나열된다. 자, 이제는 이 여행지를 오목조목 쳐내야 한다.
그의 여행 제의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는 7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민간인이 된 사람이었다. 해외 가기 쉽지 않았던 그에게 지금의 자유는 너무나도 고팠던 것이며, 신나게 놀고 싶으리. 그 마음을 알기에 수많은 여행지를 받아들여 공휴일과 휴가를 적당히 버무리고, 눈치라곤 없는 사원처럼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그와 추억이 된 여행은 10번 이상이며, 그중 해외여행은 연속 4번, 4개월의 텀으로 매번 4박 이상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4개월이면 예정된 여행을 가기도 전에 다음 여행의 비행기를 잡아야 한다. 또한 그의 극성으로 중간중간 짧게 국내 여행도 잊지 않고 다녔다.
쉬지 않는 여행은 고역이다. 23살 혼자 5주간 터키와 동유럽을 다녔을 때, 3주가 지나니 집냄새가 그리웠다. 여행이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 방 폭신한 이불에 누워 자고 싶었다. 그와의 여행은 웃음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즐거움을 주지만, 여행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지속되는 여행에 돈이 없다 핑계를 대면 그는 비행기 티켓을 사주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여유가 없는 건데…. 티켓까지 사줄 정도로 나와 가고 싶어 하는 그를 더 이상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 덕에 나는 여행이 물려졌다. 정확히 말하면 “여행에 미친 남자 친구”가 진절머리 나게 되었다. 2024년 12월 두 번째 삿포로 여행을 마치고 나는 최소 6개월의 쿨타임을 선언했다.
여행이 왜 싫겠는가, 그는 내가 직장인이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는지 매번 여행 기간을 4박 이상 주장했다. 평범한 직장인이기에 여름휴가철을 제외하고 연속으로 3일 이상 휴가를 낸다는 것은 굉장한 결심일 것을 직장인이면 공감할 것이다. 회사 프로젝트 일정, 매달 공휴일의 유무, 여행 기간, 여행 비용 등 달력을 뒤적거리며 여행을 가기 위해 치밀한 계산을 해야 한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공백은 일 처리를 나 대신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것이기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더 이상 아고다를 뒤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집냄새를 맡으며 침대에 늘어져있고 싶을 뿐이다.
나를 위해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한다는 결심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기’를 시전 하기로 했다.
호응은 하되, 현실성 없게 지나가는 것으로 포인트는 말장난하듯 넘어가야 한다. “카자흐스탄 직항이 생겼대. 좋아 보인다. 항공사 초특가 할인한대! 우리 발리도 가야 하는데, 너는 왜 나랑 여행 안 가줘?” 그가 여행지를 대하는 모습은 마치 마트에서 먹고 싶은 과자를 고르는 것처럼 쉽다. 또한 나를 흔하디 흔한 싼 과자조차 사주지 않는 누나로 만들어버린다.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참고로 남자친구 전역 선물로 우린 두 달 뒤 푸꾸옥 여행을 앞두고 있다. 마구 주먹질을 하고 싶지만 “그래그래 가는 김에 세계 일주라도 할까?” 하며 받아친다.
여전히 그는 수많은 여행지 DM을 보내며 나를 낚기 위해 중간중간에 귀여운 동물도 끼워 놓는다. 하지만 이제 스케줄 확인이나, 며칠을 갈 것인지 묻지 않는다. 부처처럼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래 좋다 하며 그의 여행 제의를 맞장구쳐줄 뿐이다. 그는 어쩌면 나와 여행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걸지 모른다…. 언젠가 갈 그런 여행을 기리며….
그는 오늘도 말한다. “제주도에 가자. 한 일주일 정도?”
나도 말한다. “아냐.. 그럴 거면 한 달 살이를 하자.”
오늘도 창과 방패의 싸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