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두려워하다 실패하는 지역 먹거리

지자체에 '사이드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

by 달품씨

100억짜리 건물보다 100만 원짜리 '실험'이 지방을 살린다.


1. 프롤로그 : 랜드마크의 역설, 왜 우리 지역은 변하지 않는가

전국의 어느 지방 도시를 가도 비슷한 풍경을 마주한다. 수백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거대한 박물관이나 화려한 조형물들. 지자체들은 이를 '지역의 먹거리'라 부르며 야심 차게 내놓지만, 준공식의 박수 소리가 잦아들면 그곳엔 이내 적막만이 흐른다.

우리는 그동안 '거대한 한 방'에 집착해 왔다. 완벽한 조감도가 지역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인정해야 한다. 지방을 살리는 힘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치열한 실험'의 합에서 나온다.


2. 인사이트 : '실패의 잿더미'에서 피어난 빅테크의 영광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업무 시간의 일부를 떼어 '사이드 프로젝트'를 장려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혁신은 책상 위 기획안이 아니라, 현장의 '베타 테스트' 끝에 탄생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구글(Gmail) - "20% 시간의 반란": 이메일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였을 때, 한 직원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된 Gmail은 '검색'과 '대용량'이라는 파격적인 실험을 던졌다. 초기엔 내부에서도 회의적이었지만, 이 실험은 구글 생태계의 핵심이 되었다.

· 아마존(AWS) - "내부 문제를 비즈니스로": 아마존 웹 서비스(AWS)는 처음부터 판매용 제품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복잡한 서버 문제를 해결하려던 '사이드 프로젝트'가 오늘날 아마존 수익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전 세계 클라우드 표준이 되었다.

· 슬랙(Slack) - "실패한 게임의 부산물": 원래 슬랙은 '글리치'라는 게임을 만들던 팀의 내부 소통 도구였다. 게임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덤으로 만든 소통 툴이 수조 원 가치의 유니콘이 되었다.

· 네이버(Naver) - 퇴짜 맞은 사업계획서의 기적: 네이버의 모체인 '웹글라이더' 팀은 삼성SDS 사내벤처 1호였다. 당시 창업자 이해진 의장의 인터넷 서비스 기획안은 처음엔 회사로부터 거절당했지만, '사내벤처'라는 실험 공간이 있었기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3. 진단 : '실패하면 안 되는 행정'이 만드는 혁신의 역설

글로벌 기업들이 '빠른 실패(Fail Fast)'를 지향할 때, 우리 지자체는 여전히 '무결점 기획'이라는 낡은 관성에 매몰되어 있다. 이것은 담당 공무원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장벽이다.


· 경직된 예산과 감사의 공포: 한 번 책정된 예산은 반드시 '성공'으로 증빙되어야 한다. 실패는 곧 예산 낭비이자 감사 대상이 되는 시스템에서 누가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겠는가?

· 4년 임기의 조급함이 만든 '콘크리트 치적': 지자체장은 차기 선거를 위해 임기 내 가시적인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화적 생태계 조성'보다는 당장 리본을 끊을 수 있는 거대 건축물에 예산을 쏟아붓는 이유다. 하지만 '보여주기'에 급급해 시장의 반응 없이 세워진 건물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운영비를 축내는 짐이 되고 만다.

· 관성적 KPI의 늪: 여전히 주무 부서의 성과 지표는 '방문객 머릿수'와 '체류일 수'에 맞춰져 있다. 지역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활력을 불어넣는 '생활인구'의 질적 성장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4. 제언 : 이제는 '기획자'가 아닌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의 강력한 드라이브는 여전히 지역 발전의 핵심 동력이다. 다만, 이제 그 동력은 완벽한 정답을 독점하는 '설계자'의 역할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민간의 창의성과 공공의 자원이 안전하게 충돌하고 섞일 수 있도록 '정책 샌드박스'의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 행정의 새로운 역할이 되어야 한다.

· 실험 주체의 확장: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민, 행정의 실무를 쥐고 있는 공무원,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이주민이 한데 엉켜 지역 자원을 활용해 실험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줘야 한다. 이러한 협업 자체가 지역의 새로운 활력이자 자산이 될 것이다.

· 실패를 용인하는 '혁신 예산': 결과물(Output) 중심의 예산 구조에서 벗어나,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는지(Process)와 '실험의 횟수'를 평가지표로 삼는 특례 예산 구조가 필요하다. 실패해도 괜찮은 예산이 있을 때, 비로소 공무원과 주민들은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 부서 간 장벽 철폐와 통합 거버넌스: 지역 먹거리 창출과 활력 제고는 특정 과의 전유물이 아니다. 관광, 농업, 일자리, 도시재생, 심지어 복지에 이르기까지 지자체의 전 부서가 '지역 살리기'라는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실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부서 간의 '칸막이 행정'을 허물고, 행정력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여 지역 자원을 입체적으로 활용할 때 비로소 파괴력 있는 혁신이 일어난다.


5. 에필로그 : 99번의 값진 시행착오를 기대하며

우리는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지만, 행정의 현장에서 실패는 대개 '예산 낭비'나 '과오'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두려워 검증된 과거의 방식만을 답습하며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좋은 정책의 발원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기획자의 치밀한 분석이 담긴 책상 위에서 태동할 수도 있고, 먼지 날리는 현장에서 벌어진 사소한 베타 테스트 중에 우연히 발견될 수도 있다. 정답이 어디에 숨어있을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행정의 전 과정에서 더 가볍고, 더 빈번하며, 더 다각적인 도전을 이어가야 한다.

이러한 도전이 가능하려면 지자체장의 선구안만큼이나 주민들의 인식 변화가 절실하다. 주민들이 100만 원짜리 실험 99번을 '세금 낭비'가 아닌 '지역을 위한 투자'로 지지해 줄 때, 비로소 행정은 실패의 공포를 넘어 창의적인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왜 당장 건물이 올라가지 않느냐"는 재촉 대신, "우리 지역에서 어떤 흥미로운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주목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이 혁신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이제 지자체장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정답을 한 번에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아이디어가 현장과 책상을 오가며 안전하게 충돌할 수 있도록 울타리를 쳐주는 '행정의 관용'이다.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공포 대신 "이 실험으로 무엇을 배웠지?"라고 묻는 문화가 정착될 때, 공무원의 전문성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주민은 단순한 민원인을 넘어 능동적인 파트너로 거듭난다.


지역 소멸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는 무겁고 단단하기만 한 방패가 아니라, 끊임없이 부딪히며 경로를 수정하는 유연함이다. 99번의 값진 시행착오를 기꺼이 껴안아야, 비로소 우리 지역을 먹여 살릴 '진짜 먹거리'가 탄생할 것이다.

내일 아침, 우리 지역의 골목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엉뚱하고도 치열한 '사이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를 진심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워케이션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워킹 로케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