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이 오사카와 교토 2박 3일 예약을 했다. 작년부터 계획된 여행이었는데 막상 예약을 하려니 여권이 만료가 되어 다시 만들어야 했다. 내가 갖고 있었던 여권은 출입국 도장 하나없이 텅빈 채로 먼지만 소복히 쌓여 있다가 이번에 속절없이 최후를 맞았다.
딸과 함께하는 자유 여행이었다. 게다가 비용과 여행 일정을 모두 딸이 부담하고 계획했다. 찐 효도 여행인 셈이었다.
오사카의 다른 이름은 대판이고 얼마 전에 ott에서 방영한 파친코의 무대, 교토는 우리나라 경주 같은 고도인가, 하는 것 정도가 나의 사전 지식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딸이 준비한 여행이라지만 최소한의 정보와 지식을 장착하는 성의는 보여줘야지.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여행지의 세계로 풍덩 뛰어들어 보기로 했다.
블로그와 유투브는 얼마나 쓸모 있는 신 문명인지. 시내 교통, 맛집, 쇼핑 목록, 료칸 등 여행 후기들을 열심히 챙겼다. 처음에는 생소하기도 하고 이름이 비슷 비슷해서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몇 번 반복해서 보니 이것 저것 조금씩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과 구체적인 일정과 여행할 지역들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딸은 덕후 답게 점프샵(애니메이션 굿즈 샵)도 일정에 포함했다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셀프 기특)
딸이 일정을 짜기 전에 여행 가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었다.
-쇼핑이지 머.
-뭐 사고 싶어?
-과자를 사야지, 고형 카레와 드립 커피도, 이모가 그러는데 일본에는 신발이 좋대. 굉장히 편한 신발도 별로 안 비싸다고 하더라고
-어디 가고 싶어?
-전통 시장에 가볼까? 료칸에는 꼭 가보고 싶어. 온천 욕이 내 로망이잖아.
이래 놓고도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 한 켠에는 여행을 가면 뭐하나 하는 생각도 불쑥불쑥 올라왔다. 돈만 있으면 우리나라가 최곤 데, 가서 고생만 바가지로 하는 게 아닐까? 할 일이 산더미인데 내 몰라라 하고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지인이 딸하고 여행 갔다가 학을 뗐다는 말이 생각나서 나도 그러면 어떡하나, 겁이 나기도 했다.
여행을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딸을 생각할 때 나의 염려는 얼토 당토 않는 여린이의 잡생각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런 생각은 점차 엷어지고 유투브나 블로그를 보며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고조되었다. 여행 팜플릿을 보는 순간 우리의 뇌는 그곳으로 먼저 간다라는 말처럼 내 의지와 별개로 나의 뇌는 이미 여행지에도착해서 일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우리는 새벽 3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인천공항을 갔다.
수속을 마치고 7시 비행기를 탔다. 국제선은 처음이었다.
비 자발적 해외여행 제로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딸은 e심을 깔고 나는 유심을 갈아 끼웠다.
딸은 머대잠(머리대자마자 잠듦)답게 바로 잠들었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승무원이 공기 주머니 사용법과 구명 조끼 입는 법을 시연했다.
사고가 나면 저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 이람 하는 생각과 함께 약간 무서운 마음이 들면서 비행기 타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친구의 마음도 조금 이해가 되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날개를 보다가 비행기가 점점 높이 떠오르며 보여주는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날씨가 잔뜩 흐려서 인지 지상의 모습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서 잠시 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비행기 아래의 구름의 모습이 놀랄 정도로 장관이었다. 회색 구름이 뭉글몽글 뭉쳐서 널따랍게 펼쳐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모양이 변해서 똑같은 구름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몽글몽글 뭉쳐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아진 형태가 성처럼 이어져 있기도 했다. 지상에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만 보다가 하늘에서 발밑에 펼쳐진 구름의 모습을 내려다 보니, 그 거대한 실체를 비로소 조금 다가간 느낌이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란 말이 생생하게 깨달아 졌다.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보여지는 단면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1시간 20분 만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우메다 역은 뭐 타고 갈 거야?
-리무진 타고 갈 거야.
솜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쉴 새 없이 검색을 했다.
-솜아 그러지 말고 좀 물어봐라.
일일이 검색해서 찾을 라고 하면 얼마나 피곤 하노?
유창한 일본어 실력 이럴 때 써 먹어야지,
인포메이션 부스도 천지로 널렸구만. 제발 좀 물어봐라.
-엄마는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잔소리가 많노?
리무진을 후닥닥 타고 창밖을 내다보니 해안가로 오오사카 공장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저기가 오사카의 공장지댄가 보다.
-쉿! 조용!
-왜?
-쉿! 큰소리 안돼.
-아니 관광객이 신기해서 그러는디, 왜 그랴?
-마구 떠들면 안돼
-쳇!
아무려면 어때, 그래도 괜찮았다. 난 이미 한국을 떠난 몸이었다. 몸이 떠날 때 자질구레한 생각도 다 털어버렸다. 아니 저절로 공중 분해되었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토록 늦은 깨달음이라니! 여린이는 여린이다.
(계속 이어서 써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