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가 부족한 탓이 아니에요.
영어 공부법 코칭을 하다 보면 존경스러운 성실성을 지니신 분들을 자주 만난다. 코칭을 시작할 때 항상 그동안 해왔던 공부 방법과 고충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이 책을 독파하면 될까 싶어서 통째로 외웠어요. 그런데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단어를 많이 외우면 될까 싶어서 일단 단어장 세 권을 샀어요. 2권 째까지는 괜찮았는데 3권부터 도저히 안 외워지더라고요... 그때 포기했어요.' 학생분들의 영어 역사를 듣고 있자면 사실 나는 세상 게으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귓속으로는 두 문장이 들어온다. '게을러서 안 했죠 뭐. 의지가 부족해서 그래요.'
5년 간 영어를 가르쳐 오면서 '의지가 부족한' 학생분은 만난 적이 없다. 지. 금. 은 의지가 부족해 보이는 경우는 있다. 이런 경우는 지나간 열차를 보내고 환승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과 같다. 한창 의지를 불태우고, 이런저런 공부법을 시도해보고, 신통치 않자, 이 열차로는 '영어 정복'이라는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중도하차한다. 사람마다 환승역에서 다음 기차를 마냥 기다리거나 적극적으로 다음 열차 시간을 알아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영어 정복'으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는 주기적으로 그 크기를 달리하며 마음속에서 항상 반짝이고 있다.
그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안내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일 것이다. 영어 정복의 길 위에서 길을 잃은 이들을 만나 진단한 결과 대부분의 영어 공부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가장 컸다. 1) 공부를 위한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거나 2) 레벨과 상황에 맞지 않았던 공부법. '단 칸 방에서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공부했어요.'라고 말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우리가 쫓아야 할 롤모델이라고 듣고 자란 탓인지 우리는 자주 공부 실패의 원인을 의지 부족에 둔다. 성취에 있어 의지는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른의 공부는 더욱이 그렇다.
의지 부족을 원인으로 꼽는 것은 문제에 대한 가장 쉬우면서 동시에 가장 괴로운 해결책이다.
Q. 왜 실패했지?
A. 의지가 부족해서
Q. 그렇구나. 난 왜 이렇게 의지가 부족하지?
A. 내가 원래 그렇지 뭐. 의지를 키워야겠어.
'의지 키우기'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해결책을 가진 채 일단은 영어 공부 휴식기를 갖기로 한다. 의지 부족에 실패의 원인을 두면 '실천하기 - 실패하기 - 스스로에게 실망하기'의 루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괴롭다.
그간의 영어 공부가 성공적이지 못했던 모든 분들께 '의지가 부족했던 탓이 아니에요. 환경과 공부법을 바꿔보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른의 공부는 외롭다. 학교에서와 달리 '영어 공부할 거야.'라고 하면 기꺼이 함께 하고자 하는 친구는 없다. 퇴근 후 하나 둘 카페로 술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공부를 지속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외로움을 얻은 대신 우리에겐 학창 시절보다는 아주 조금 여유 있는 주머니와 스마트폰이 주는 환경을 설정할 자유가 있다. 더 이상 세상이 강요하는 공부 환경에 우리를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 적어도 영어 공부 있어 의지 부족을 실패의 원인으로 두고 자존감 하락을 겪을 필요가 없다. 대신 환경과 공부법에 의문을 갖고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면 다음에 시도해 볼만한(혹은 시도해 보고 싶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영어 정복행 다음 열차로의 환승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언어 덕후이자 영어 강사. 현재 1일 1보 잉글리시라는 1인 기업을 운영하며 어른들을 위한 영어회화 수업을 열고 공부법 코칭을 하고 있다. 건축을 전공했으나 '영어 수업하는 날이 일주일 중 제일 기대되는 날이에요.' 하는 학생 분들의 말씀에 중독되어, 영어 교육 분야에 눌러앉았다. 덕분에 언어학, 교육학, 마케팅 등 공부의 홍수 속에서 부지런히 헤엄쳐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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