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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10. 2021

타인의 편지 (4) : 아이였던 사람의 책임

오늘은 고등학교 삼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뵙고 왔어. 


석사를 마치고 졸업 논문을 꼭 한번 드리고 싶었거든.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선생님은 내 최초의 팬이셨어. 내가 재수를 하면서, 그간 쓴 글들을 처음으로 정리를 했던 때가 있었어. 그때는 막 입학사정관 제도가 도입 되었을 때였거든. 수능 공부를 하는 중에도, 여러가지를 지원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때였어.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면서도, 이것 저것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면서, 그리고 막 터져나온 생각들을 받아쓰기 시작하던 때. 그것들을 모아서 철학과란 철학과에 마구 마구 넣어보려고. 그때. 담임선생님의 추천서가 필요했고, 나는 그간 묶은 것들을 담임선생님에게 보낸 뒤에, 추천서를 부탁드렸지. 아마도 그때부터 였을거야. 선생님이 내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는 학창 시절 때에는 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 말로도 해소되지 못한 것들 안에서 번민하면서 방황하고 있었거든. 그때에도 담임선생님은 나를 잘 몰랐어. 하지만 나는 선생님을 좋아했지. 잘 가르치는 것 보다도 합리적이고 개방적이었고, 또 낙천적이었거든. 하지만 내가 당신을 그리 보고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지. 처음으로 내가 선생님에게 개인적인 말을 건넨 것은, 졸업식 날이 되어서였어. 망한 내 수능에, 내 재수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고, 그런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편지를 써드렸어. 내가 본 모습들, 내가 생각하던 선생님의 좋은 점과 같은 것들 말이야.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내가 보고 있지만, 타인은 모르던 것들을 서술해서 사람을 기쁘게 하던 순간 말이야.


정말 웃겼던 점은 말야, 선생님은 그게 정말 좋으셨던지, 그 편지를 다음 학기초에 임시반장을 불러내서 내 편지를 읽게 시켰다는 거야. 그 이후로도 나는 입학사정관제에 지원하기 위해 묶은 글 말고도, 주기적으로 글을 써서 정리한 뒤에는 늘 선생님을 다시 뵈러 찾고는 내 글들을 드렸어. 선생님은 정말 팔불출 처럼 그럴 때면 주변 선생님들에게 나를 자랑하셨던 거야. 언제는 학부모 회의 때, 내가 군대에서 썼던 소설 비스무리 한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말하셨지. 지금에야 돌아보면, 내 지난 글들은 조악하고 또 손볼 곳 투성이지만, 그렇게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기억이었던 것 같아. 


오늘 찾아 뵈었던 선생님은 한결 같으셨어. 늘 배우고 또 감사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직업에 만족한다고도 말씀하셨지. 가끔은 선생님이 지나치게 나를 동료 선생님들에게 띄워주는 것 같아 낯이 뜨겁기도 했지만, 그만큼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자전거 여행도 가시고, 내일은 또 풋살 경기를 하신다는 것을 들으며 기뻤어.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이제는 나로부터 배운다고 말씀하시고,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을 내 앞에서 낮추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어. 그러나 그만큼 내게 언제나 은사님인 그런 은사님 앞에서, 나는 늘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지. 그 말은 사실 틀림 없거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흘렀어. 선생님은 어느덧 늘 부장선생님이었고, 또 그만큼 나이가 많이 드신 거지. 당신을 뵈러 갈 때면, 예전 생각들이 많이 나. 사실 공부보다도, 좋아하던 여자애와, 남자들 사이에서의 서열과, 친구 관계 같은 것들이 더 많이 신경쓰이던 그런 날들 말야. 그 안에서 나는 결코 좋은 학생만은 아니었어. 담임 선생님한테는 사랑을 받았지만, 그때의 치기어린 태도로, 선생님들에게 오만하게 대들기도 했었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용서하기에는, 가끔 그들도 처음이고, 또 그들도 어렸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주 싫어하던 그때 그 시절의 선생님이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는 것을 깨달을 때 말야. 지금 나도 내 삶을 종잡지 못하는데, 그때 그들은 어땠을까. 물론 나이는 상대적인 거지만 말야.


그러던 중에, 선생님으로부터 부고를 듣게 됐어. 우리에게 문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는데, 얼마전에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거야. 담임선생님은 내가 그 분을 기억하는지를 우려하면서 조심스레 말씀하셨지만, 사실 나는 그분을 아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어.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고, 이렇다할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는데도 말야.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터져나오는 생각들을 몰래 몰래 적고 있을 때였어. 지금 가지고 있는 메모하는 습관들은 아마도 그때 처음 생겨났던 거로 기억해. 작은 PD노트였는데, 그건 글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생각들의 파편과 같은 것들을 우선 아무렇게나 적어대던 거였지. 그게 수업시간이라고 해도 말야. 그래. 그때 그 문학시간이었어. 나는 또 생각난 것들을 적고 있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발견하고는 내 수첩을 낚아 채서는 교실 앞으로 가셨지. 그러면서 내 수첩을 들고는 아이들 앞에서 낭독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아이들은 웃었고, 나는 내 초라한 변명이 아직도 생각나. 그저 ‘어디서 노래 가사를 배꼈을 뿐이라고.’ 나는 부끄러웠던거야.


그런데도, 나는 사실 그 선생님을 미워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순간에 내 감정과 선생님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거든. 선생님은 그것을 읽다가 그 내용과 내 표정을 보고서는,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셨어. 내 수치심과, 또 그 내용의 -조악할지라도- 개인적인 무게와 같은 것들 말야. 당신은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내가 괘씸해 했으면서도, 여전히 문학적 자존심과 고결함 같은 것에 예민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어. 그때 그 사람의 당황한 표정을 나는 읽을 수 있었고, 또 그제야 한마디 덧붙이던 어색한 한마디. 


“그래도 이런 친구들이 나중에 훌륭하게 되는거야.” 


이 말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게 칭찬도 아니고, 비꼬는 것도 아니고, 다만 미안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지 모르기 때문에 어색하게 튀어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어. 그때 아이들은 그 누구도 그 선생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어. 선생님은 좋은 학교를 나와서 문학적인 자존심과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나 아무 생각도 없이 책상 위에서 누워 자기만 했던 우리는 당신의 자존심을 채워주지 못했지. 


이제와서 돌이켜보는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지나치게 넘겨 짚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 그러나 적어도, 나는 당신이 우리에게 실망하면서도, 또한 우리들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스스로에게도 실망하고 있다고 느꼈어. 담배를 피우고 걸린 아이의 뺨을 때릴 때에도, 그것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과도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선생님이 자신의 폭력성에 스스로 상처받고 있다고 느꼈어.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거든. 이제와 맞은 당사자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정글같은 곳에서, 태평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에게 둘러쌓인 그 선생님에게도 자신의 일들이 버겁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거야.


나는 사실 매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면서도, 늘 그때 그 생각을 했어. 내가 나의 글을 어디서 잃어버려도 부끄럽지 않게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그때 그 순간이었거든.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이었어. 그건 다만 선생님이 내 글을 아이들 앞에서 낭독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디서 들은 노랫말을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변명하던게 말야.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인데도, 나는 그걸 부끄러워 했던 거지. 그리고 또 그렇게 내 표정을 보고서, 미안해 하던 당신의 표정에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 안의 예민함이라는 것을 어떻게든지 이해했던거 같아.


그리고 가끔은 다시 만났을 때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드리고 싶었어. 그때 그 순간이 내게는 이제와 별 것 아니라고. 오히려 그 순간으로부터 뻗어나온 나의 변화와 그 결과를 알려드리고 싶었어. 물론 아직도 그리 내세울 것은 없지만 말야.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늦어버린거야. 그때 문득 나는 책임을 느꼈어. 그냥 어리고 또 너무나 어려서, 마치 어른인 당신들이 우리를 이해해야만 한다고 뻗대던 그런 순간들 안에서도 말야,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생님들도 우리들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어.


어쩌면 내가 내 담임선생님에게 마지막 날 편지를 써드렸듯이, 그때 그 문학 선생님에게도 내 이러한 마음들을 적어 보냈다면 어땠을까. 그건 너무나 과도한 생각일까. 나는 내 조악한 말들이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말하는 건 아냐. 다만, 내가 느낀 것들, 내가 그에게서 어떠한 방식으로 받았던 것들에 대해서, 이제와 더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픈거야. 그때 우리는 인생의 시작 앞에서, 너무나 어렸지만, 그러한 어린 우리를 감당해야 했던 그 선생일이라는 것도 늘 쉽지 않았고, 또 처음이었겠지.


우리는 어디엔가는 책임을 지워야하고 또 그렇게 할거야. 그 책임은 늘 어른들이 짊어졌기에 이제와 뒤늦은 어떤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겠지만, 그 사실에 문득 쓸쓸하고 외로워져. 벌써 10년이 넘게 흐른 뒤에 당신의 죽음을 내가 함부로 왈가왈부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건 아마도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다만, 그저 한번 생각해보는거야. 누가 주워다 읽어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어. 그 선생님 덕택에 말야. 그리고 또 수업 중에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도 생각했지. 하지만, 그렇게 한바탕의 삶을 살아버리고 난 뒤에, 이런 말들은 이미 늦었고 또 너무 많이 늦은 거 같아서.


우리 더 늦기 전에 해야할 말들이 있다면 말야.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어도, 오늘에야 조금씩 더 해보는 것은 어떨까. 


문득 그런 제안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더 늦기 전에 편지를 쓰는거야. 고마웠다고. 많이 배웠다고. 


그런 뒤에도 사라진 한 사람. 여전히 담임선생님과 나는 술 한잔.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늘 그러겠지만, 문득 오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너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어.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살아주기를 바라.


안녕.


2020년 11월 2일


p.s 


그때 그 문학 선생님 말야. 수능날 내가 배정된 학교에 오셨었어. 각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배정된 곳들을 각자 도맡아서 나섰었거든. 그때 유일하게 활짝 웃으면서 아이들을 포옹했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어. 내가 정말로 언제 당신을 용서하고 또 괜찮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그리 웃으며 포옹해줄 때, 나도 웃으며 포옹했던게 기억 나. 그 모든 모습들 안에서 내가 이제와 무얼 느꼈는지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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