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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pr 24. 2019

<어벤져스 엔드게임> : 돌이키는 것과 되찾는 것

*스포 다수

영화 한 줄 감상평에 <내 20대를 채워줘서 고맙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벤져스의 대단원의 결말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내가 문득 스물아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내 최고의 영화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아이언맨 시리즈를 보게 된 이후로 대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지금까지, 정말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나의 이십 대를 고스란히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날에 이르기까지 홀로 볼 때도 있었고 또 누군가와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 옆을 채워준 다양한 사람들. 그 하나하나를 똑똑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은 나를 지켜주었던 그런 친구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나는 나의 이십 대를 보냈던 것이다.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다. 어떤 관계는 더 이상 접합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어떤 관계는 다시 만나 새로 시작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알게 된 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의 저물어가는 이십 대도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되찾을 수 있는 것은 늘 있다. 어제 싸우고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되걸 수 있고, 또 망가진 핸드폰을 센터에 맡길 수도 있다. 다시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지난날을 후회하고, 그 시간으로 돌아가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되찾을 수 있는 것을 되찾는 방식으로 나아왔던 것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분명히 시간여행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시간을 이용해서 내가 지금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바꾸고 쟁취해낸다.


시간여행이라는 장르의 전통적 방식


시간여행물의 전형적인 특징은 과거를 바꿈으로써 현재 벌어진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대체의 미래를 등장시킨다는 데에 있다. 나는 <엔드게임>이 그러한 형식을 따르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히어로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히어로들이 요청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조차 무시무시한 빌런인 타노스에게 패배하고 나서, 그 패배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기만적이다. 


우리는 그간 파편화된 히어로들 개개인의 노력들을 지켜봐 왔다. 그 과정은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토니는 아버지를 잃었고 마지막 패배에서는 스파이더맨을 잃었다. 사람들을 잃은 트라우마와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증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으로 나아왔다. 캡틴 아메리카는 의도하지 않게 70년의 세월을 얼음 속에서 상실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해야 했다. 토르는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이복동생 로키를 잃었다. 히어로들은 그런 희생 속에서도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내며, 그리고 잃은 상실을 받아들이며 나아왔던 것이다.


단순히 과거를 바꿈으로써 현재를 바꾸는 여러 시간여행 장르의 전형적인 공식은 희생을 통해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한 것을 지킨다는 원칙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이를테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시간을 조정함으로써 그들이 상실한 모든 것을 복구시킨다는 룰은, 그들이 과거에 잃었던 것을 손쉽게 되돌리는 것이며, 그들의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면 좋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끝맻는다는 것은 10년에 걸친 그들의 노력에 허무하고 간편한 해법을 제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 여행'에서 '시간 강탈'로


그래서 영화는 엔트맨의 양자 세계를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단순한 시간여행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강탈'이라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들이 시간여행을 하는 이유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지금 필요한 것을 되찾기 위해서다. 


흔적 없이 사라진 사람들을 되살리는 방법은 그 인피니티 스톤을 다시 모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을 말살한다는 과업을 마친 이후에 타노스는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이유는 과거에 존재하는 어린 타노스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패배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타노스를 이기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지금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인피니티 스톤을 지금 그들이 있는 세계로 가지러 돌아가는 것이다.


이 룰의 핵심은 인피니티 스톤에 의해서 죽은 사람들 이외에는 되살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토르의 동생 '로키'도, 토니 스타크의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도, 토르의 어머니도, 전투 과정에서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사람들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지키기 위해서 희생한 것, 희생함으로써 지켜낸 것


히어로는 언제부터 히어로였던 걸까? 그것은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책임질 때부터이다. 그들은 상실을 자기 자신의 상실로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성장해왔다. 토니는 늘 자신이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강박증과 불안 속에서 성장해 왔다. 원래 그는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었다. 천재 엔지니어에 재산은 턱 없이 많다. 문란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재능으로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소비하고 즐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또 자신이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잃고,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면서 그는 책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타노스에게서의 패배 이후에 먼지가 되어 버린 피터 파커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고, 그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파한다. 그 이후에 그는 딸을 얻었고, 그 책임은 더욱 무거워진다. 


시간은 늘 소중한 것을 앗아가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한다. 그조차도 여러 가지의 것들을 희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토니는 시간여행에 한한 지금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고 새로 얻은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내걸고, 시간여행에 동참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여지것 봐온 역사의 복습이다. 히어로들은 각각의 시간 안에 흩어져 있는 인피니티 스톤을 훔치려는 계획 속에서, 그때 그 시절 자신들을 발견한다. 과거를 재대면한 히어로들은 결코 그 시대의 역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하다. 첫째로, 역사를 바꾸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세계의 시간을 바꾼다고 해서 지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영화의 대전제였다). 둘째로 그 시간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 시간 속에서 이미 그들 자신이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기 때문이다. 어벤져스 1편에서 그들은 치타우리 종족의 거대한 침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훌륭히 그것을 방어해냈다. 그 시절의 몫은 늘 그들의 몫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과거로 간 히어로들이 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되찾아야할 인피니티 스톤을 되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에 그들이 어땠었는지를 되깨닫는다. 그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은 오로지 지금에 이르기 위해서 존재했고, 지금이 부디 더 나은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그리고 바로 현재의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도 역시 희생이 존재한다. '소울 스톤'을 획득하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할 때, 블랙 위도우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결국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히어로들처럼 희생하지는 못하지만, 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마다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크고 작은 것들을 양보하고 기꺼이 포기하며 나아가고 있다. 그런 것 없이 얻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고, 그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돌이키는 것'과 '되찾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의 방법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이별하는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 사람을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하나의 후회이고, 상상에 그치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할 지라도, 여전히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기분과 감정과 모든 정보들에 의거해 우리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방법은 지금 내가 다시 그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지금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것이 오직 내가 과거에 잃은 것을 되찾는 방법이다. 물론 그 혹은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수도 있고, 마음이 벌써 떠나버렸을 수도 있으며, 혹은 이 세상을 아예 떠났을 수도 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당연한 삶의 공식이다. 우리들이 받아들이듯 히어로들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모두들 힘들게 받아들인다. 토니가 다시 그의 아버지 하워드를 만났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연히 주어진 그와의 대화시간일 뿐이다. 영웅들은, 그리고 또 우리들은 이미 많은 것들을 잃고 희생했다. 그것은 아픈 희생이지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고통을 위해 주어진 희생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여전히 희생이 따른다. 마지막 전투에서조차 많은 희생이 뒤따른다. 그들은 사라진 인류의 절반을 되찾기 위해서 싸울 뿐이지, 시간을 돌이켜 되돌리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과거를 거슬러 미래로 찾아온 타노스와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서 또다시 사라지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를 구해야만 한다는 그 강박과 책임으로 싸워온 아이언맨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슬프게 떨렸던 이유는, 우리가 그의 강박증과 트라우마를 야기하던 책임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잃지 않는 방법은 없다.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것은 히어로 영화에서는 더욱 두드러지지만, 우리의 일상에도 이미 그때마다 존재하는 분명한 원칙이다. 사람들은 발버둥 치고 또 잃은 것에 아파하며 그렇게 나아왔던 것이다. 토니는 자신으로 시작한 어벤져스의 역사를 자기 자신의 희생으로 끝을 맻는다.


다시 삶 앞에 선 우리의 이야기


약 십 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아왔는가. 그것을 복습해 본다. 어떤 것은 여전히 되찾을 수 있고, 어떤 것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일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은 여전히 지켜왔던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들을 지켜가고 되살리기 위해서 또 무언가를 희생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바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또 무엇을 어떻게 잃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기에는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늘 해왔던 그런 일일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그들의 정든 동료들과의 시간을 희생해서, 과거로 돌아가 이미 예전에 늙어서 사라져 버렸던 연인을 찾아갔다. 그가 선택한 것은 그녀의 부활이 아니라, 그녀와의 시간이다. 우리도 또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또 더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할 때, 우리는 내 삶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나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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