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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l 04. 2019

영화 <조 Zoe> : 사랑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번에도 시사회에 초대되어서 영화 <조>를 먼저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영화 <조>는 잘 만든 영화이다. 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관람을 권하고 싶다. 


이 영화는 사랑 영화라는 점에서 인공지능을 가진 사이버 비서와의 사랑을 다룬 <허 Her>와 비슷한 맥락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어둡고 하드코어 하다. 그런 점에서 좀 더 철학적이다. 어떤 점에서 차라리 <엑스 마키나>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인공지능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를 동시에 건드린다. 하나는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당연히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보통은 둘 중 하나에 더 치중할 수밖에는 없다. <허>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엑스 마키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주목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문제는 같이 풀려야 한다.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아주 슬기롭고 예리하게 보여준다. 나는 그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이하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분석이 이어질 것이다.



1. 로봇이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투박한 물음


콜은 사람들 사이에 연애의 성공 확률을 알려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로봇 개발자다. 그 연구소에서는 커플들이 찾아오면 그들의 관계의 성사 가능성을 퍼센티지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 확률은 정말로 그대로의 적중률을 보여준다. 그러한 회사 안에서 콜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데, 사람들과 연애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다. 이에 종사하는 콜의 야심은 사랑의 실패를 통한 아픔으로부터 인간들을 해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와 걸맞지 않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다 다투고 또 헤어진다. 그것은 큰 상실과 아픔으로 남는다. 콜은 그 상실과 아픔을 제거하고 순전한 사랑의 만족만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성사될 확률을 보여주면서 카운슬링을 해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예 인간의 곁에서 끝까지 남아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된다면 확률을 계산할 이유조차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편, 그 연구소에서 감독일을 맞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조'다. 조는 회사 생활을 하며 콜과 왕래하다 그를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과 콜이 얼마나 어울릴지가 궁금하다. 이러한 이유로 조는 콜과의 매칭 확률을 테스트해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는 0퍼센트로 나온다. 조는 이에 대해서 콜에게 털어놓는다. 그러자 콜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며, 사실 그녀는 콜이 만든 로봇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영화는 당연하게도 중반부까지 인간인 콜과 로봇인 조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또 로봇과 인간 사이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철학적 생리적 실질적 문제들 때문에 갈등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드러내면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인간과 로봇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 아니다. 우리는 순진하게 "로봇과 인간은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물을 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인간과 인간은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바꿔 물어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이성애자이며 여자와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해도, 당장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밖에 지나다니는 수많은 여자들 중에 하나를 골라잡아서 내 멋대로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시도해야 하고, 그들에게 구애를 하거나 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구애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둘의 관계는 보장되지 않는다. 서로와 서로는 변해가고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관계의 경로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 "나는 로봇은 고사하고 인간과는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인간이랑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랑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특수한 하나의 개체와 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대상은 아직 미결정자로 남아있는 한 개인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어떤 대상이고, 그 대상과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할 때 도대체 어떠한 일을 겪는가? 영화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인간과 로봇을 비교함으로써 이루어지지도 않고, 사실은 로봇도 인간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억지스럽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로봇과 인간의 사랑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도대체 사랑이 가능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2. 사랑의 두 조건


우리는 사랑을 다음처럼 투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 : <사랑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한 정의는 지속적으로 영화 속 인물들이 지니는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우리는 사랑의 조건을 다음의 두 가지로 좀 더 세분화해서 나타낼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


1)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2) 그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 둘을 관통해야 한다. 


그래서 콜과 조의 사랑은 저 대전제 때문에 지속적으로 위협받는다. 우선은 둘 사이에 (1)이 충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두 번째 감정 때문에 이 둘은 혼란을 겪는다. 그러면서도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또 서로가 서로에 의해서 변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관계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조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거기서 조의 인공물질들이 그녀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콜은 자신의 창조물인 조를 능숙하게 고쳐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수리 행위'를 통해서 콜은 조가 결국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고 또 실감하게 된다. 그녀는 어디서 나타난 하명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로봇인 것이다. 자신의 창조물에 불과한 조를 콜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인간끼리 할 수 있는 가장 사랑답지 않은 사랑 : 베니솔


조의 사고를 기점으로 그 둘의 관계가 좌절된다. 그 후에 콜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고 일을 그만둔다. 로봇을 만들어서 인간들을 위한 상처 받지 않는 사랑의 대상을 만든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신조차도 로봇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탄생한 한 명의 인격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괴로워하고 상처받는다. 그것이 인격의 탄생이 의미하는 바다. 하나의 인격은 강렬하고 취약하다.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강렬하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취약하다. 결국 그러한 인격의 가능성이 사랑의 가능성일 터였다. 그러나 그 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 뒤에도 콜은 조를 그리워하며 긴 방황의 시간을 겪는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베니솔'이라는 약이다. 그 약 역시도 콜이 관여한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 약을 먹으면 그 둘은 잠시 처음 사랑할 때의 그런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주 오래되어 권태를 느끼던 커플들도 그 약 하나면 처음 만나 두근거리고 설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약이 나온 뒤로, 많은 사람들은 연애를 하는 대신에 누구든 즉석에서 만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다. 즉석으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베니솔을 먹고 짧은 하룻밤의 관계를 즐기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 두 관계는 그저 원나잇의 섹스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사랑하는 순간의 그 느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즐기는 것이다. 콜은 처음에는 이따위의 관계가 더는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계는 그저 반창고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그 반창고를 떼어내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에 사무친 콜은 결국 베니솔을 투약하고 한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리고 그때 느껴지던 정말로 놀라운 사랑의 경험. 눈앞의 사람을 위해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것은 정말로 사랑할 때의 감정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잠에서 깬 뒤에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상대는 짧은 밤을 뒤로하고 침대를 떠난다. 남겨진 콜도 약효가 끝난 뒤라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은 그 인스턴트의 형식을 가진 그 진정한 사랑의 느낌에 중독된다. 


우리는 약을 투약하고 그 약이 발생시키는 감정에 기대 낯선 이와 즐기는 짧은 밤의 섹스가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그러나 그 기이한 관계의 형태야말로 우리가 처음 제시한 사랑의 조건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첫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져야 할 것, 둘째 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의 느낌을 실감할 것. 


그 사랑에 조건에 부합하는 하나도 사랑 같지 않은 그 관계는 조가 로봇이라는 이유로 떠났던 콜이 선택한 관계였다. 영화는 베니솔을 이용한  사랑의 체험과, 인간과 로봇의 관계인 콜과 조의 사랑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를 통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며 우리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말할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느낌이 아니고, 또 행복감만으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러한 것들로만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던 것일까?


4. 가장 좋은 것만 가져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 : 조 Zoe 2.0


인간이 사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달콤한 음식들 사이에서 바로 그 '달콤함'만을 추출해 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콜이 연인 관계의 성공률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콜은 사랑했던 사람과 이혼했다. 그래서 아팠다. 그 때문에 상실의 아픔에서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인간을 떠나지 않는 로봇과 사랑의 기분을 발생시키는 베니솔의 개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사랑의 까다로움과 상실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고, 사랑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과 충족감만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다.


콜이 떠난 뒤에도 로봇 개발 프로젝트는 지속되었다. 콜과 사랑에 빠졌던 조는 사실상 불완전한 모델이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이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진화했지만, 그만큼 상처에 취약했으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을 떠나지 않는 연인으로서의 로봇으로는 실격품이다. 그 때문에 더 완전한 조 2.0이 개발되었다. 그녀들은 조 1.0보다 더 똑똑하고, 더 섬세하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인 그녀들은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을 떠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완전하고 적절하게 맞춰줄 수 있게 된다.


콜은 베니솔이 아니고서는 더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중독자의 처지가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조를 만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콜은 조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옛날 집에 있었던 것은 그녀와 똑같이 생긴 조 2.0 이었다. 그녀는 콜에게 자신이 예전 버전의 조와 똑같은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모든 성향이 자기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리고 더 진보했다.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모두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러니 옛날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자신에게 해도 괜찮다. 


이에 콜은 사실은 조에게 사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다 괜찮다고, 그를 용서한다고 콜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때 콜은 깨닫는다. 콜은 말한다 : 


"그녀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제는 또한 인간과 로봇을 비교하지 않는다. 조 1.0과 2.0을 비교한다.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는 존재와 상처를 주고 나를 떠난 바로 그 존재다.



5.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고, 또 그와 사랑할 때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용서받고 싶지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떠난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돌아오기를 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떠난 사람은 이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가 설령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한번 떠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다시는 접합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와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느낌과, 행복과, 충만감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들은 종종 사랑의 이유도 될 수 있고, 사랑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만나는 순간 그들의 역사는 기억으로 기록되고, 그 안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와 모멸과, 상실과, 죄책감들이 기록된다.


그래서 내 앞에 있는 더 완전해지는 조2.0은 내가 아는 그 조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함께한 그 역사를 함게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원하던 그 용서를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쉽게 용서받고 또 나를 받아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그 로봇을 더욱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로봇 다운 로봇은 당연히 내가 사랑했던 그 존재조차도 아닌 것이다.


콜이 조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콜에게 묻는다 : "그러면, 나를 진짜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인조피부를 걷어내고 그 안에 흐르는 붉지 않은 피와 인공물질들을 보여준다. 콜은 말한다 : 


"내 앞에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어."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그것은 나를 속수무책으로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 역시도 속수무책으로 나로 인해 아파할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그 대상은, 우리가 그 대상에게 늘 속수무책인 그런 대상이다. 그리고 그 속수무책의 역사가 사랑하는 대상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사과에서 당을 추출하는 것처럼 사랑에서 좋은 것만을 뽑아낼 수 없다. 사랑에서 흥분과 고조감과 행복감만을 추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속수무책의 '타자'와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는 그것을 '속는 것'으로 표현했다. 인간의 조건, 그것은 내가 그것에 압도당하고 예측당하고 패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조>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내게 상처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은 상처받을 수 있음을 반드시 함축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역사가 내가 사랑하는 그 대상을 특별하게 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인간적인 것임을 함축한다. 진짜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짜이다. 



6. 나는 사랑할 수 있을까?


모든 조건이 마련되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 그런 조건은 없다. <로봇과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명제가 사실이라고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없다. 정말로 그런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면, 우리는 그것에 구애할 수 있어야 하고, 거절도 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절에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도 그 관계는 진전되기는커녕 영영 단절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게 끝난다면 <로봇과 사랑할 수 있다>라는 것이 검증된 뒤에도 "나"는 무엇과도 영영 사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무리 <나는 여자와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당장 아무나 골라잡고 연애를 시작할 수 없는 그 이유와 정확히 같다.


그런 뒤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 특수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밝혀진다고 해도 나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의 여부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다. 조와 콜은 이루어져본 적이 없는 관계를 시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여느 사랑이 그렇듯 단순히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 또한 사랑을 한다는 것의 의미다. 사랑이 가능하고 또 그래서 내 사랑이 가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멍청한 실수를 하거나 권태에 빠져서 그렇게 결별한다.


그 안에서 모든 노력들은 보편적인 것이 되기를 거부하고, 나는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몸짓과 말짓으로, 나와 함게 역사를 쌓아갈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과 조우해야 한다. 그 무엇도 그 관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나'와 내 눈앞에 있는 어떻게든 내게 상처 입고 상처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뿐이다. 그런 뒤에 남는 상처들은 사랑의 반례가 아니라 사랑의 증거가 된다.


그런 뒤에 존재할 우리의 위대한 도약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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