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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Nov 04. 2021

볼펜 실종 사건

그리고 밀실 사건까지 

"엄마가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범인일 리 없다. 나는 그런 적이 없으니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기억이 없으니까. 






볼펜, 사라지다 


  두 녀석을 잘 보내줬다. 부드러운 녀석들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놈들이었다. 딱딱한 척해도 속은 보드랍기 그지없었다. 

  시 필사에는 그런 만년필이 적격이었다. 그립감은 딱딱해도 힘주는 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녀석들. 그런 놈들을 둘이나 보냈으니, 다음 목표물을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예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만년필로 이어갈까 했는데, 우연찮게 손에 들어온 볼펜이 웬만한 만년필보다 더 보드라웠다. 이런 걸 두 글자로 '운명', 세 글자로 '맺어짐', 네 글자로 '데스티니(?!)'라고 하는 거다. 기다려, 조만간 나와 함께 하게 될 거야. 


  이틀 후, 필사 공책을 펼치고 책상 연필꽂이를 뒤졌다. 어라? 나의 새 짝이 없다. 나는 볼펜을 이곳에만 둔다. 이상하네. 흠, 주방 연필꽂이에 있나? 주방으로 가 보았다. 없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흔적도 없어, 그 어떤 자취도 없이. 

  책장 구석구석, 아이들 색연필 통, 아이들 책장 사이사이, 인형 집, 가족사진 뒤, 칫솔꽂이, 가스레인지 옆, 전자레인지 안, 침대 매트리스 밑, 엘리베이터 앞. 어디에도 없다. 볼펜이 실종된 것이다! 

  어떻게 생겼더라,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얀색이었던 것 같은데... 매끈한 몸매와 어둠같이 검은, 깊이 숨은 잉크볼... 좀 더 자세한 생김새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희미하다. 한 번 끄적여 본 게 다여서 다른 외관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하얀색이었던 것 말고는 기억나지 않지만, 단 하나, 그 부드러운 필감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폰을 보았다. 기다리다 몸이 달아 폰 밖으로 나오려는 시가 자꾸 부른다.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았다. 

  30분을 온 집을 헤매고 결국 다른 볼펜을 잡았다. 아, 이건 아니야, 한참 잘못되었어. 힘을 잔뜩 줘야 겨우 쓸 수 있는 데다가, 색도 진하지 않다. 안 그래도 악필인 글씨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넌 아니야. 너도 아니야, 넌 최악이야. 그렇게 매일, 나의 영혼과 짝을 이루지 못한, 하루만 내 품에 안긴 채 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희생양이 되어버린 볼펜들이 나체를 드러내고 필사 노트옆에 늘어만 가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볼펜, 발견되다


  "엄마, 죄송해요, 오늘 받아쓰기 70점 맞았어요."

  "괜찮아, 다음에 80점 맞고 90점 맞고 100점 맞으면 돼."

  오호라, 이것 봐라, 세 번 연속 100점을 받아 오더니 70점이라니. 겉으로는 웃으며 상냥한 엄마 코스프레를 했지만, 내 안의 볼펜 주인이 시커먼 얼굴을 하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머리 위로 치솟지는 않았는지 내심 신경이 쓰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걸 보면, 엄마 자아가 연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뚜껑을 잘 덮긴 했나 보다.


  저녁 설거지까지 마치고 아이들까지 다 씻기고 입혔다. 이제 첫째 받아쓰기를 봐 줄 시간이다. 

  "8 단계 했었지? 오늘 9단계 연습할 차례인가?"

  네, 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받아쓰기 교재를 펼쳐보고는 놀라지 않은 척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선생님... 8.2단계랑 8.5단계랑 8.6, 8.8단계를 거치고 9단계를 주셨어야죠... 이 레벨 차이 무엇


  하루이틀 봐줘서 될 게 아니구만. 일단 1번부터 쭉 써보라고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딸아이의 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읍이 그게 아니야, 미음 잘못 썼어, 말해주고 싶지만 모든 게 귀찮다. 그래, 저렇게라도 쓰는 게 어디야...

  무심히 시선을 여기저기 두다가 흠칫, 한 군데에서 멈추었다. 어? 엇? 아이의 필통에 꽂혀 있는 저것은? 혹시나 하고 조심스레 빼보았다. 아무 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선을 그어 보았다. 이거! 이 그립감! 이 잉크 느낌! 이 만족감! 볼펜을 찾은 것이다.

 

  "ㅇㅇ아, 이 볼펜 엄마가 계속 찾았는데 못 찾았었어. 여기 있었네. 이 볼펜 왜 여기 놨어?"


"나 아닌데요. 엄마가 그런 거 아니었어요?"

..................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범인일 리 없다. 나는 그런 적이 없으니까.


  나는 모든 볼펜을 책상 펜꽂이 아니면 주방 펜꽂이에만 둔다. 그렇기에, 내가 쓰려고 한 펜을 아이 필통에 꽂았을 리가 없다. 

  

  문득 아득해진다. 

  

  내가 그랬다니, 그럴 리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의자는 세 명이다. 아빠, 둘째, 셋째. 

  일단 아빠. 저 사람은 집에 오면 씻고 밥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본다. 아이들을 양치를 시키고 유튜브를 더 보고 잠에 든다. 아이 필통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도록 한다.

  셋째는, 볼펜을 필통에 끼울 힘이 아직 안 된다. 뽑을 수는 있어도 끼우지는 못한다. 얼마 전 언니 필통에 연필을 끼우려다 못해서 울고 불고 소리를 지르다 언니와 아빠한테 쌍방향으로 혼나고 엄마 품에서 한참 운 선례까지 있다. 그러므로 셋째도 용의선상에서 제외.

  그렇다면, 남은 용의자는 둘째.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둘째는 외관상 명백히 사람의 형태이나, 하는 짓은 아직 사람과 금수를 왔다 갔다 한다. 시크릿 쥬쥬 노트북에 가장 흥미를 보이고 유치원에서 가져온 영어책을 보며 '헤이, ㅗㅈ홈;ㅅㅈㅎ;ㅁ미? 오케?'라고 중얼거릴 때는 문명사회에 물드는 듯도 하지만, 대부분은 큰 눈을 껌뻑이며 멍 때릴 때가 많다. 이런 둘째가, 엄마가 목표한 펜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언니의 필통에 꽂아두는,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짓을 저지른다?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첫째인 건가. 근래 거짓말이 조금씩 늘고 있는 첫째다. 그러나 이 역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얼마 전 거짓말한 게 들통나서 아빠한테 눈물 콧물 다 빼도록 혼난 이후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엄마이다, 한눈에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엄마가 그런 거 아니었어요?'라고 묻는 무심한 표정에 진실이 묻어 있었다.

  게다가 첫째는 필통에 연필과 지우개만 꽂아 사용한다. 조금씩 문구류에 눈을 뜨는 첫째이기에, 자신의 필통에 볼펜을 허하는 그런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나,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왜, 무엇하러, 무엇을 위해 나의 볼펜을 아이 필통에 꽂는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다. 


  "엄마는 안 그랬는데..."

  말을 흐리며 볼펜을 무릎 밑에 일단 놓고 무릎으로 꾹 눌렀다. 좀 있다 치워야지, 하며 왼쪽 무릎에 괜스레 힘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더는 기억이 없다. 받아쓰기 공부를 마치고, 온 가족 양치를 하고, 아이들 얼굴에 로션을 발라 주고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 아이들 등원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나는 소리 없는 괴성을 질러야 했다. 필사를 하러 간 컴퓨터방바닥에, 정확히는 내 왼쪽 무릎이 지그시 볼펜을 누른 그 지점에, 볼펜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푸드덕하고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며칠째 안개가 짙게 낀 아침이었다.         







똑. 

똑. 

.

똑.


  주방이다. 이렇게 먼 거리감이 느껴지는 물소리는 주방이다. 바로 옆 화장실이었다면 조금 더 가깝게 들렸겠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불규칙적일수록 내 심장 소리는 더욱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조금 더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저기서, 내가 볼펜을 무릎 밑으로 숨겼는데. 그 자리 근방 1미터 아니 컴퓨터방 어느 곳에도 볼펜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그곳인가. 





비밀의 열쇠가 여기에 있다


  나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꼴깍. 마른 침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졌다. 저 키티도, 인어공주 핀도 알고 있겠지, 진짜 범인과 그가 한 짓을. 그렇다고 그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그들에게 범인의 행적을 묻는 걸 누군가 본다면, 그는 즉시 정신과 전화번호를 검색하겠지. 


  용기를 내어 빨간 필통으로 손을 뻗었다. 

  똑. 

  똑.

  똑똑

  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빨라졌다. 물방울이 내 심장 박동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물방울 소리 간격이 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똑, 마지막 소리가 들리고도 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필통의 배를 갈랐다. 






  기묘하다. 아주 조금, 소름이 끼쳤다. 

  피의 색을 지닌 필통의 창자에서 나는 내 볼펜을 확인했다. 기묘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나의 첫째 딸은, 자기 필통에 연필과 지우개만 허락한다. 동생들이 종이와 지우개 가루와 머리핀과 볼펜(!)을 넣으려 할 때마다 울며불며 싫어하던 아이이다. 둘째는 '필통이 뭐예요?' 하는 아이이다. 26개월이 다 되어가는 셋째는 언니 필통에 무언갈 꽂을 힘이 없다. 아빠는 어제저녁 내내, 잠이 들기 직전까지 유튜브를 보았다. 이는 내가 직접 목격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이를 범인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범인은 바로, 볼펜 자신인 것이다.







볼펜, 밀실에서 


  '범인은 볼펜 자신이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또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필통의 구조를 보면, 필통은 밖에서만 열고 닫을 수 있다. 그러니까, 볼펜이 스스로 필통 안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안에서는 문을 닫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필통은,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완전한 밀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떠한 흠이나 상처없이 정돈된 자세로, 마치 이곳이 원래 내 자리라는 포즈로 그렇게 볼펜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얼 그렇게 봐, 나야, 어제 그 볼펜. 네가 무릎으로 나를 숨도 못 쉬게 눌렀잖아, 기억 안 나? 

- 아... 그, 그건 기억나는 데... 그러고 나서....

- 그러고 나서... 기억이 안 나?


  나는 내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 머리와 내 손이 각각의 주체가 될 수도 있는 건가,라고 생각하려다 말았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그저, 애셋 키우는 평범한 아줌마일 뿐이다. 물론 볼펜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즐기는 변태악취미가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단언컨대, 나는 볼펜을 아이 필통에 두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왜냐 하면, 그런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하는 데 아주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볼펜의 허리를 꺾으려다, 그의 머리통을 몇 차례 눌렀다 뺐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다리를 잡고 아무 종이에 휘갈겨 보고는, 조금은 기묘한 웃음을 입꼬리에 올렸다. 그리고, 매일 시 필사하며 브런치에 잡글이나 쓰는 애셋 아줌마로 다시 돌아왔다. 하마터면, 아까운 볼펜 하나를 그냥 보내버릴 뻔했잖아. 






  아침 필사를 기분 좋게 마쳤다. 시는 아름다웠고, 부드러운 필사 감에 아침에 벌어진 사건들이 말끔히 잊혔다. 노트를 접고 대충 정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고 밥을 먹었다. 노트북을 가지러 컴퓨터방에 갔다가, 어라 볼펜이, 없어졌다?! 바닥에도, 노트에도, 아이 필통에도 없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는 있을 것이다. 




  볼펜은 숨 쉰 채로내일 아침도 컴퓨터방 어딘가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는 운명이고 맺어졌고 데스티니이니까, 내일 내가 필요로 할 때 나타날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내 손은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될 거니까. 


 

눈물 자국은, 제풀에 희미해지도록 놔두시게




대문사진은 '넥서스' PPL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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