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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15. 2021

어부, 어부

업는 육아, 포대기 사랑

  “언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보면 몰라? 애 업고 있잖아.”

  “할머니도 아니고 왜 애를 업고 있어요, 하하.”

  아파트 옆 동 친구 엄마들이 웃으며 말을 건다. 나 역시 웃으며 대답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애를 낳아 ‘요즘 육아’하는 친구들이다. 아기띠나 힙시트도 거의 하지 않고 유모차만 태우는 그들이 보기에는 내 꼴이 우스울 법도 하다. 아이를 업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는 젊은 엄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아이를 업는다. 둥가 둥가 아이를 업고 아파트 단지 공원을 거닌다. 아이를 ‘어부바’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기에.     






  팔자에도 없는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육아도 체질에 없으면서, 미련하게 생기는 대로 낳아 키우고 있다. 두 살 터울의 딸만 셋.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처럼, 육아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자꾸만 핏줄만 늘어갔다. 



  첫 아이는 초여름의 더위가 시작되던 즈음 내 품으로 왔다. 신생아답게 못생겼었다.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고, 성장 속도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오롯이 내게만 삶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생명체 앞에서 어찌해야 할 줄 몰라 버둥대기만 하던 나날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정엄마가 대뜸 포대기부터 찾는다.     


  “아무리 애 키우는 걸 몰라도 어찌 애를 안 업고 여태 키웠어? 중고시장 보고 아무거나 하나 빨리 사. 애를 업어야 뭐든 하지, 너도 좋고 애도 좋고!”     


  그렇게 조금은 촌스러운 하늘색 포대기를 구했다. 친정엄마가 업고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한다. 그렇게나 울던 아이가 조용히 잠이 든다. 등에 착 붙어 새근새근 잘도 잔다. 품에 안고 흔들어 주고 다독여 주고 어찌해도 울기만 하던 아이가, 초보 엄마 보란 듯이 잠을 잔다. 엄마, 이렇게 편하게 재워 줘.      

지금은 드림되어 다른 집으로 간, 우리 아가들을 키운 포대기


  “아이에게 업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따뜻하지, 엄마 심장 소리 들리지, 배 속에 있을 때처럼 흔들리지. 엄마는 또 어떻고. 아이랑 붙으니까 엄마 기분 좋고, 두 손이 편하니 일도 할 수 있고 재우기도 쉽고. 애는 업어 키워야 해.”


  이론으로는 잘 알겠으나, 아이를 업기에 나의 등은 성글었다. 아이를 등에 올리는 자체가 어려웠다. 겨우 아이를 등에 올리면 포대기를 묶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업고 나면 등에는 아이의 눈물인지 나의 땀인지 모를 것이 흘렀다. 나의 등은 할머니와는 다른 것을, 아직은 여물지 않은 엄마의 등임을 알아차린 아이는 더 크게 울어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이는 엉덩이까지 흘러내렸다. 아이는 업어 키우는 게 아니었다. 업는 것은 할머니들에게만 허락된 행위였다. 그렇게 설익은 엄마는, 포대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 버렸다. 

아이를 겨우 업고 나서. 5분도 안 돼 아이는 줄줄 흘러 내렸다.

          

  2년 후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둘째가 태어났다. 좀 익숙해졌다지만 나의 육아는 여전히 어설펐다. 오히려 더 혹독해졌다. 군인인 남편은 내가 조리원에서 돌아오자 훈련 가더니, 바로 다른 부대로 이동해서 주말에만 집으로 왔다. 다시 포대기를 꺼내었다. 아이를 업고 싶은 마음은 첫째 때보다는 훨씬 더 간절해졌으나, 몸은 마음을 역행했다. 아무리 동영상을 보며 아이를 업는 법을 배워도, 아이는 울음으로 불편함을 드러내고는 지쳐 잠들었다. 역시 나에겐 아기띠가 어울렸다. 아이를 앞으로 멜수록 어깨는 굽고 등은 아팠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업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업지 못해 육아가 더 고되지는 것 같아 한스러웠으나, 아이는 일관되게 내 등을 거부했다.      



  할머니들이 오면 달랐다. 아이는 할머니 등에서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 보다가 까르르 웃으며 놀다가 어느새 잠이 들곤 했다. 눕혀도 쉽게 깨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들은 아이를 업고 일을 했다. 할머니의 등도, 그 등에 찰싹 붙어 업혀 있는 내 아이도 미웠다. 옛날 사람들이니 옛날식으로 키우는 게 편한 게지, 내 안의 치기 가득한 불만과 질투는 할머니의 등과 잠든 아이의 새근거림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셋째가 100일이 갓 지나던 즈음 나의 산후우울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무거워지는 아이를 모든 순간 안고 있으니, 목과 어깨와 팔이 고장 났다. 모유 수유 때문에 먹는 약, 붙이는 약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몸으로 다섯 살과 세 살, 갓난쟁이 육아를 온전히 짊어지고 있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어느샌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닦을 힘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우울도 키우고 있었다.      




  죽으란 법은 없었다. 시어머니가 사정이 생기셔서 1년간 지낼 거처를 구해야 했다. 맏며느리의 요청에 선뜻 와주신 시어머니는, 화장실 옆 방에 살림을 차리셨다. 그때부터 막내는 할머니의 등에서 자랐다. 칭얼거릴 때, 잠을 자야 할 때 모든 순간 할머니의 등과 함께 했다. 칭얼거림은 잦아들었고 잠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미인 나는 그 모든 순간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를 등에 올리고 아이의 전신을 내게 기대게 하는 그 행위는, 내리사랑을 형상화한 모습 그 자체였다. 두 손은 아이의 작은 엉덩이를 떠받들고 시선과 눈높이를 아이에 맞추어 아이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순간이 주는 선물이었다. 아이를 업을 수 있는 시간에만 허락된, ‘지난한 육아에 대한 처방’ 같은 것이었다. 치유받고 싶었다. 

  아기가 10개월간 배 속에서 들었던 심장 박동 위에, 내가 품었던 아기의 심장 박동을 포개어 보았다. 아기의 눈길이 닿는 곳을 나도 바라보았다. 아이의 발이 까딱거리는 것을 허리춤에서 느껴 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아이는 어느새 안락한 잠에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의 단잠을 나의 등이 떠받들어 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진짜 엄마가 되었다. 업혀 있는 아이와의 교감은, 감히 활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아이의 넘치는 치사랑을 나는 셋째를 업으며 온전히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 시어머니께서 나를 보며 말씀하신다.  

  “우리 며느리 손녀딸 못 업더니 이제는 잘 업네!”       

   

  사실 이 모든 것은, 시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녀는 70년을 고스란히 담은 육아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40여 년 전 남편을 업었을 그 등에, 이제는 좀 더 작아졌을 그 등에 나의 딸을 업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를 업고 이 방 저 방 거닐었다. 잠이 들면 아이를 눕히고, 깨서 울면 다시 아이를 업었다. 할머니의 포대기 육아 어디에도 고됨과 짜증과 불만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친정엄마 역시 그러했다. 아이를 업고는 집안 곳곳을 서성였다. 아이와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했다. 할머니들의 등에는 남편과 나를 키워 온 흔적이 모두 남아 있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오랜 이야기에 자기의 온기를 더했다. 설익어 떫기만 한 엄마의 등은 아이가 기대기엔, 그땐 아직 무르익지 못했다.     





  아이가 9개월에 들어서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 아빠, 맘마를 열심히 내뱉으며 기어 다니던 막내가 갑자기 내 등을 탁탁 두드린다.     


  “어부, 어부.”     


  어머니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고 또 아이를 보았다. 무얼 놀라냐는 듯이 아이는 다시 등을 두드린다.      

  “어부, 어부.”     


  냉큼 아이를 업어 올렸다. 할머니와 엄마에 업혀 있을 때마다 주문같이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가 아이의 옹알이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아이에게 '업히는 것'은 할머니와 엄마의 등이고 놀이고 휴식이고 사랑이었다. 넘치는 그 마음을 작은 입으로 뱉어냈다. 그렇게 업힌 아이는 역시나 엄마 등을 탁탁 치며 놀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손 닿는 것 만져 보다 잠이 들었다. 나의 등에서 잠든 아이를 거울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등이 건넨 마음을 너는 일찍이 알고 있었구나. 업힌 채 보는 세상을, 업고 업혀서 함께 하는 시간을 너도 나만큼 간직하고 있었구나. 아이가 언어로 ‘어부’를 뱉은 날, 어미는 어깨너머 아이의 숨결같이 포근한 추억을 받아 들었다.      


  그날 오후, 첫째와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뛰어나온다. 막내의 온기가 남은 그 등에 첫째를 업어보았다. 준비되지 못한 육아에 희생된, 그러나 그마저도 자식의 마음으로 거뜬히 받아들여 준 첫째를 제대로 업어보았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묵직함도 잠시, 아이의 웃음소리가 내 귀를 마구 때린다.      

  “엄마, 나도. 엄마, 나도.”     

  둘째가 내 다리를 붙잡고 졸라댄다. 첫째를 내리고 둘째를 업는 순간, 목을 꽉 껴안고 뒤쪽으로 흔드는 바람에 휘청했다. 장난기 넘치는 둘째 덕에 넘어질 뻔했지만, 마냥 즐거운 아이를 보며 같이 크게 웃었다. 나의 육아는 왜 그리도 가난해 이렇게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업어주지 못하고 키웠을까. 엄마의 등이 내뿜는 모성의 기운 느껴 보지 못한 채 커버린 첫째와 둘째가, 그 날따라 유난히 크게 웃었다. 어쩐지 아이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번갈아 가며 업어주었다. 첫째는 그날따라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잘도 풀어놓았다. 둘째는 그저 목을 꽉 안을 뿐이었다. 이따금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면, 작은 얼굴에 큰 미소가 가득했다. 아이들의 배와 나의 등이 포개진 부분은 금세 뜨거워졌다. 서로의 몸에 스며든 뜨거움은 어느새 내 눈에서 더 뜨겁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 나이 6살이 돼서야 진짜 ‘업어키우기’를 알게 되었다.           





  이따금 아이를 앞으로 안고 있는 지친 표정의 엄마들을 보게 되면, 괜한 오지랖을 부리게 된다. 

  “아기를 뒤로 업어주면 좋아요. 아이도 편하고 엄마들도 몸이 덜 아파요. 저도 앞으로 안았었는데, 요즘은 업어주거든요. 육아가 덜 힘들어요.”

  대부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짧은 감사만 전한다. 오히려 아이를 업고 있는 나를 조금은 낯선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저 그녀들의 육아가 유난히 고된 그런 날, 나의 오지랖이 힌트처럼 다가가길 바랄 뿐이다.    

 

  오늘도 아이를 업어 재웠다. 막내가 자라면서 업혀있을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기에, 조금은 조급하고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를 업는다. 언젠가 아이의 기억 속 한구석에 남아 있을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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