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사 Sep 16. 2022

뜨거운 안녕

당연했던 것들을 뒤로하고 (feat. 모스크바 경유)

2017년 9월 5일. 비행기 티켓에 인쇄된 그날이 다가왔다. 지내보니 일 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금방이었는데, 출국 전에는 꼭 몇 년은 떠나는 사람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곳저곳에 여행을 다녀왔다. 아마 떠난다는 이유보다 일에만 치여 살던 나에 대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엄마가 인천공항에 데려다주던 풍경이 선명하다. 빨랫거리 줄어들고 집 늘어놓을 사람 없어 좋다고 노래를 부르던 엄마는, 공항 내 나와의 마지막 식사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으며 눈물을 훔쳤다. 다 큰 딸 집 떠나는 게 뭐가 그리 슬프다고. 하지만 질 수 없지... 나도 접시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그렇지만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 때문인지 드라마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나는 떠나야 했고, 엄마도 나를 떠나보내야 했으니 엄마와 난 뜨겁게 안고 서로에게 안녕을 보냈다.



코펜하겐은 직항 비행기 노선이 따로 없다. 사람들은 주로 헬싱키나 카타르, 뮌헨 등에서 경유하는데 나는 제일 저렴한 표를 구하느라 아에로플로트를 이용했고, 모스크바에서 경유를 하게 되었다. 내겐 비행기를 탈 때마다(심지어 장거리라고 하더라도) 꼭 창가 쪽 좌석을 지정하여 앉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가 아니면 그렇게 높이서 하늘을 볼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촌스럽지만 중간중간 창문으로 보이는 낯선 대륙과 망망대해들이 더 설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이 콩콩거리는 마음으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누가 앉는다면 코만 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분이 짐을 올리고 자리에 앉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분은 러시아를 경유해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곧이어 이륙을 안내하는 스튜어디스의 방송이 들려왔고 비행기 엔진이 굉음을 내며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지면에서부터 멀어지면서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앞으로의 일 년이 기대되기도 하면서 또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인한 초조함이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때 기내식사를 제공한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잠을 좀 잘까 싶어 음료로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는데, 옆에 앉아계신 여자분도 화이트 와인을 시키셨다. 서로의 행선지를 물음으로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이야기가 무르익으며 와인을 각자 두 잔씩 더 요청하였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이 예쁘장한 분은 부산에서 오신 분이었고, 회사를 잠시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긴 휴가를 가시는 길이라고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보다 너 다섯 살? 나이가 있으셔서 그냥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경유지인 모스크바에서 시간이 한참 남아 시내에 다녀올 생각이라고 했더니 그분께서도 마침 그럴 생각이었다면서 함께 하자고 제안하셨다.


우리가 도착하는 모스크바는 저녁 시간일 터였고, 나 또한 이분과 함께라면 초행인 러시아 밤길을 더 마음 놓고 다니겠다 싶어 우리는 나란히 공항을 나섰다.


모스크바는 세레예미테보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자정까지 3시간 남짓한 여유뿐이었던 우리는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명소 붉은 광장으로 향하였고, 그곳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에 들어섰다.



러시아의 지하철역은 여느 국가들에서 본 것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박물관에 온 듯 또는 유서 깊은 지하 궁전에 온 듯 지하철 역사 하나하나가 거대한 동상들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샹들리에로 채워져 있었고, 그와 함께 연식이 오래된 듯 보이는 열차는 마치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왠지 그럴듯한 소련의 향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늦은 저녁 열차에 동양인이라곤 나와 언니뿐이었으며, 우리는 지하철 2호선 테아트랄나야(Театральная)역에 내려 붉은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적은 양의 흩날리는 비가 오고 있었는데, 워낙 광장이 크고 가는 길이 멀다 보니 어느새 비를 가린다고 쓰던 스카프가 거의 젖어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감탄할 만한 광경을 마주했다.



TV에서만 보아왔던 크렘린궁과 성 바실리 성당, 그리고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광장의 건축물들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밤이라는 시간대라 그런지 깜깜한 야경과 붉게 빛나고 있는 건축물들의 조화가 장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행한 언니와는 각자 기념이 될만한 사진을 몇 장씩 촬영하고, 마트로시카(러시아 목제 인형)를 구매한 후 비에 맞은 몸을 녹이기 위해 근처 굼백화점 1층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는 화려한 가구와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었고, 한 곳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언니와 나는 각자 마시고 싶은 차를 주문하여 따끈한 차를 마시며 비행기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Yann Tiersen - (아멜리에 OST) Comptine d'un autre été



여러 번 돌려본 영화 아멜리에의 삽입된 얀 티어슨의 피아노 연주였다.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 사람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눠보니 너무나 잘 통하였고, 우연히 모스크바에 함께 오게되어, 우연히 들른 찻집에서, 너무나도 좋아하는 곡을 듣게 되다니. 머리가 몽글몽글했다.


무언가 시작부터 느낌이 좋은 듯 하여 타지 생활을 앞두고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졌었다.



우리는 그렇게 의미 있던 차한 잔을 하고 공항으로 돌아왔고, 곧이어 다른 행선지로 떠나는 언니를 배웅하며 나는 뜨거운 안녕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공항에 홀로 남게 되었다. 코펜하겐으로 비행기가 떠나기까지 서너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던 터라 공항 벤치에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는 잠깐 눈을 붙였다. 두어 시간  날은 밝아왔고 드디어 나는 코펜하겐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가의 이전글 남의 나라에 산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