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계약의 시선
"주무관님, 여기 납품서에 도장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업체가 물건을 잔뜩 싣고 와서 내미는 서류 앞에서,
많은 담당자는 그저 박스 개수만 대충 세어보고 흔쾌히 도장을 찍어준다.
"설마 갯수 속였겠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담당자는 아주 위험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바로 '검수'를 해야 할 타이밍에 '검사'완료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행정 현장에서는 이 두 단어를 '검사검수조서'라는 이름으로 묶어 쓰기도 하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행위다.
1. 창고지기의 눈 vs 품질관리자의 눈단어의 한자만 뜯어봐도 차이는 명확하다.
검수(檢受)는 '거두어들일 수' 자를 쓴다. 물건이 파손된 곳은 없는지, 주문한 수량 100개가 맞는지 확인하고 물건의 점유권을 넘겨받는 행위다. 즉, 물리적인 숫자와 외관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택배 기사님에게 박스를 건네받는 것과 같다.
반면 검사(檢査)는 '조사할 사' 자를 쓴다. 이 물건이 계약서에 명시된 시방서(규격서)대로 만들어졌는지, 성능은 제대로 나오는지, 작동시켰을 때 오류는 없는지 확인하는 행위다. 즉, 계약 내용의 이행 여부와 품질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박스를 뜯어서 전원을 켜보고 성능을 테스트하는 것과 같다.
2. 갯수는 맞는데 작동을 안 한다면?
담당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검수(수량 확인)'만 하고서 '검사(품질 확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트북 10대를 샀다고 치자. 박스 10개가 왔으니 검수는 끝났다. 하지만 전원을 켰을 때 CPU 사양이 계약과 다르거나 부팅이 안 된다면? 이건 검사 불합격이다. 그런데 담당자가 박스 10개만 보고 "이상 없음" 도장을 찍어주면, 나중에 기계 결함이 발견되었을 때 할 말이 없어진다. 업체는 "네가 검사해서 합격시켰잖아?"라고 반문할 것이고, 감사는 "제대로 성능 테스트도 안 해보고 대금을 지급했느냐"고 질책할 것이다.
3. 용역에서도 마찬가지다이 원칙은 물품뿐 아니라 용역에서도 적용된다. 청소 용역이나 행사 용역을 맡겼을 때, 인부가 몇 명 왔는지 세는 건 '검수'다. 하지만 그들이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를 했는지, 행사 시나리오대로 조명을 켰는지 확인하는 건 '검사'다.
많은 담당자가 결과보고서(두께)만 보고 대금을 지급한다. 이건 검수만 한 것이다. 결과물의 질을 따져보는 검사 과정이 빠지면, 그것은 반쪽짜리 행정이다.
4. 100%를 다 뜯어볼 순 없지만물론 수천 개의 기념품을 일일이 다 뜯어보고(검사)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표본 검사'는 해야 한다. 무작위로 몇 박스를 뜯어보고, 인쇄 상태를 확인하고, 볼펜이 잘 나오는지 써봐야 한다. 납품서에 도장을 찍는다는 건 "물건 잘 받았습니다(Received)"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계약대로 완벽하게 이행했음을 내가 보증합니다(Certified)"라는 뜻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검수는 눈과 손으로 하는 일이다. 수량을 세고 파손을 살핀다.검사는 머리와 지식으로 하는 일이다. 규격을 대조하고 성능을 따진다.
물건을 세는 것에 그치지 말고, 품질을 꿰뚫어 보라."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품질은 침묵 속에 결함을 숨긴다."그 침묵을 깨는 것이 바로 당신의 검사 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