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찍어도 계약이 '무효'가 되는 순간
"급하니까 일단 계약서 도장부터 찍읍시다. 세부 사양은 공사하면서 천천히 협의하죠."
연말 보도블록 공사나 긴급한 행사 용역에서 흔히 들리는 말입니다. 담당자는 예산 불용을 막기 위해, 업체는 일감을 따기 위해 서로 눈을 찡긋하며 '백지수표' 같은 계약서에 서명합니다. 하지만 이 낭만적인(?) 합의는 나중에 법정에서 "원래부터 없던 일(계약 불성립)"이 되어 담당자의 목을 조르게 됩니다.
1. 동상이몽(同床異夢): 도장이 계약의 전부는 아니다
대법원 판례(2017다242867)는 계약의 성립 조건을 아주 엄격하게 봅니다. 단순히 종이에 도장이 찍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사자 간의 의사가 구체적으로 합치(합의)되었느냐"를 따집니다.
즉, 발주청은 "최고급 대리석"을 생각하고, 업체는 "저렴한 인조석"을 생각한 상태에서, 구체적인 자재 명세 없이 "바닥 공사를 한다"라고만 계약했다면? 법원은 이를 계약 체결로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질적 사항'에 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라는 껍데기는 있지만, 알맹이가 없는 셈이죠.
2. "나중에"는 "안 하겠다"는 말과 같다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가 바로 "추후 협의"입니다.
"구체적인 디자인은 추후 협의한다." "납품 일정은 추후 협의한다."
민법상 계약이 성립하려면 적어도 '장래에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기준'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기준도 없이 그냥 미뤄둔 계약은,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은 합의한 적이 없네요. 그러니 업체가 이행을 안 해도 계약 위반이 아닙니다."
담당자는 업체를 '계약 불이행'으로 제재하고 싶어도, 애초에 성립된 계약이 없으니 제재할 근거조차 사라지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3. 사소한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면 조건이 된다
판례(2001다53059)는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을 지적합니다. 계약의 핵심 요소가 아니더라도, 당사자가 "이건 나한테 정말 중요해!"라고 의사를 표시했다면, 그 부분의 합의가 없으면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펜을 사는데 '색깔'은 보통 중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발주처가 "우리 시의 로고 색인 '팬톤 286C'가 아니면 안 된다"고 입찰 때부터 강조했다면? 업체가 그냥 파란색 볼펜을 가져왔을 때, 이는 단순 하자가 아니라 '계약 불성립'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담당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테일, 그것을 문서화하지 않으면 법은 지켜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