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인생이라면 축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축구 역시 '우리 편 골대에서 상대 편 골대 사이' 그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Box to Box]에는 이처럼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편집자 주]
지난 1월 호주에서 열렸던 AFC 아시안컵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호주에 석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상대가 조별 예선에서 승리를 거뒀던 호주였기에 아쉬움이 더한 결과였지만, 팬들과 언론은 대표 팀을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축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들과 슈틸리케 감독을 향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결과 보다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다. 2002년 이후로 대한민국 축구 판에 팽배했던 콧대 높은 성과주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한 달여 동안 대표팀이 호주에서 보여준 행보를 쫓으면 쫓을수록 짙게 오버랩 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불같은 투혼과 극적인 승부, 과정이라는 단계가 만들어내는 감동의 네러티브와 그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들까지 모두 이 이야기를 각색한 것만 같았다. 만화보다는 '걸작(傑作)'이라는 표현이 격에 맞는 이 이야기는 처음 연재된 9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농구팬, 아니 스포츠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회자되는 만화이다. 농구와 만화,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축구팬들 조차 축구공으로 레이업 슛을 연습하게 만들었던, 주옥같은 명대사와 메시지 있는 결말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만화 <슬램덩크>가 바로 그것이다.
손과 발, 5명과 11명. 상이한 두 장르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이 닮았다는 걸까? 어떠한 연결고리가 농구와 축구라는 전혀 다른 스포츠를 자연스레 이어지게 한 걸까?
# 캐스팅
1. 안감독과 슈틸리케 감독
슬램덩크 북산고교의 안감독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은 단순히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다. 두 감독은 선수를 선발하고 팀을 운영하는 방식까지 빼다 박았다. 슬램덩크의 안감독은 고교 전국대회 8강이라는 중요한 경기에 강백호를 투입시킨다. 공식 대회는커녕 같은 팀 동료들에게 조차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지 못했던 강백호를 오로지 그가 가진 '잠재력'을 주목해 중용한다. 타인의 평가와 편견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간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강백호는 산왕 고교와의 8강전에서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명대사와 함께 팀의 결승골을 집어넣는다.
슈틸리케 감독의 철학도 안감독의 그것과 궤(軌)를 같이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 선발 과정에서 이른바 '제로베이스' 원칙을 표방했다. 과거의 명성과 경력은 배제하고 철저히 선수가 가진 실력과 잠재력에 초점을 맞췄다. 프로시절 주목받지 못했던 이정협을 A대표팀에 전격 승선시켰다. 당시 많은 화제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정협은 아시안컵에서 2골을 기록하며 대회 최고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슬램덩크 북산과 산왕의 전국대회 8강 경기, 산왕의 올코트 프레싱 전략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안감독은 송태섭에게 "북산의 돌격대장이 돌파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골밑을 완전히 장악당한 상황에서 안감독은 강백호에게 "오펜스 리바운드를 따내라"고 지시한다. 안감독은 철저히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활용해 상황을 타개해 나간다. 슈틸리케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아시안컵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헤딩 능력이 뛰어난 중앙 수비수 곽태휘를 최전방 공격수 자리로 끌어올려 손흥민의 동점골을 견인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수비형 미드필더 및 측면 수비수 역할을 소화 할 수 있는 박주호를 왼쪽 측면 공격수로 배치해 수비력을 강화했다. 패스와 수비, 공격력까지 두루 갖춘 기성용을 측면으로 배치해 팀의 공격력을 극대화시키기도 했다.
2. 채치수와 차두리
듬직한 체격과 묘하게 닮은 외모, 채치수와 차두리는 팀의 맏형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팀을 이끌어 나간다. 산왕과의 전국대회 8강 경기, 고교 최고의 센터로 평가 받던 신현철에게 고전하고 있던 채치수는 좌절감에 빠진 자신과는 달리 모든 걸 불사르고 경기에 임하는 동료들을 보며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라고 되새긴다. 항상 주장으로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부담감을 안고 있었던 채치수는 이 경기에서 철저히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했고, 결국 후반전 신현철을 9득점으로 묶는데 성공하며 팀의 승리를 돕는다.
차두리 역시 대표팀에서 '조연'의 역할을 자처했다. 팀을 위해 헌신하고, 후배들을 다독였다. 우즈벡과의 아시안컵 8강 연장전, 모든 것을 쏟아낸 고갈상태에서 보여준 그의 80m 폭풍드리블은 손흥민의 쐐기 골로 이어졌다.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한 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후배들을, 그는 따뜻한 가슴으로 위로했다.
3. 강백호와 이정협
대회전까지 강백호와 이정협은 철저히 '노마크' 선수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 채치수의 여동생인 채소연에게 마음을 빼앗긴 강백호는 그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농구를 시작한다. 농구에 농자도 모르는 초짜 강백호는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본 안감독을 만나 재능을 꽃피웠고, 산왕과의 전국대회 8강전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다.
이정협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 부산 아이파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정협은 데뷔 시즌 27경기에 출전해 단 2골만을 득점했다. 이후 군 복무를 위해 입단한 상주 상무에서 38경기에 출전해 11골을 득점하면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상무에서의 활약을 지켜본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을 호주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에 전격 포함시켰다. 이정협은 슈틸리케 감독의 믿음에 화답했다.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한 손흥민 다음으로 대표 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2골)을 기록하며 슈틸리케호의 황태자로 등극했다.
4. 서태웅과 기성용
'명실상부(名實相符)' 팀의 에이스인 서태웅과 기성용은 잘생긴 외모와 시크한 성격, 팀에서 수행하는 역할까지 빼닮았다. 서태웅은 항상 라이벌 강백호를 퉁명스러운 말투와 냉소적인 태도로 맞이한다. 자신을 응원하러 온 여성팬들을 향한 무관심한 태도는 시크를 넘어선 카리스마로 승화된다. 스몰 포워드인 서태웅은 골밑과 외곽을 넘나드는 전 방위적 역할을 수행한다. 산왕과의 8강 경기에선 에이스 정우성에게 압도당하며 고전하지만 경기 후반 이를 극복해내며 강백호의 결승골을 돕는다.
기성용 역시 한때는 시크하고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금은 팀의 주장으로서 '중재자'의 자리인 가운데에 서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쌈닭이라 불릴 정도로 항상 누군가의 맞은편에서 매서운 눈빛을 날리곤 했다. 서태웅처럼 기성용도 그라운드 곳곳을 누비며 경기를 지휘한다. 아시안컵 호주와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 되는 등 에이스로서의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 기성용은 유사시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대표 팀의 공격을 이끌기도 했다.
5. 정대만과 손흥민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과 '승부욕의 화신' 손흥민은 어렸을 때부터 촉망받는 유망주의 길을 걸어왔다. 중학교 시절 에이스로서 팀의 도 대회 우승을 이끈 정대만은 고교시절 당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2년 여 동안 농구의 길에서 벗어난다. 다시 만난 안감독 앞에서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농구 판에 복귀한 정대만은 산왕과의 8강전에서 "그래. 나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라는 명대사와 함께 결정적인 3점 슛을 꽂아 넣는다.
2008년 당시 FC서울의 U-18 유소년 팀이었던 동북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손흥민은 KFA 해외유학 프로젝트의 일원으로서 독일 함부르크 유소년 팀으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2010년 성인 팀으로 스카우트 돼 분데스리가에 데뷔한 손흥민은 정대만처럼 팀의 득점을 책임지는 '슈터' 로서 성장했다. 호주 아시안컵에서 3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석패 한 뒤 흘렸던 그의 뜨거운 눈물은 특유의 승부욕과 열정의 소산(所産)이었다.
6. 송태섭과 김진수
정확한 패스와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가 무기인 송태섭과 김진수는 팀을 위해 헌신하는 '조력자'이다. 산왕과의 8강전에서 포인트 가드 송태섭은 강백호에게 고난이도 앨리웁 패스를 정확하게 공급해 멋진 덩크슛을 만든다. 상대의 강력한 수비에 고전하던 북산은 송태섭의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로 활로를 모색한다. 분위기 반등에 성공한 북산은 결국 고교 최강 산왕을 꺾고 전국대회 4강이라는 쾌거를 이뤄낸다.
아시안컵 이후 '제2의 이영표'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왼쪽을 책임지고 있는 김진수 역시 송태섭과 쏙 닮았다. 김진수는 측면 수비수의 만성 고민인 '올라가고 내려감'의 선택과 행동이 누구보다 빠르다.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오버래핑과 수비가담,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날카로운 크로스는 그가 왜 '포스트 이영표'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아시안컵에서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김진수는 대한민국 최고의 풀백으로 거듭났다.
# 감동은 리메이크 된다
"승리보다 값진 패배", "1등보다 빛나는 2등" 승리와 1등의 기쁨을 뛰어넘는 '감동'이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때론 과정이 결과보다 아름답다."(슬램덩크의 북산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모두 끝내 우승은 하지 못했다.)
스포츠 판에서 '결과보다 아름다운 과정'이라는 클리셰는 지루하지도 진부하지도 않다. 승리 혹은 패배, 결과라는 이지선다(二枝選多)와는 달리 '과정'이라는 다양한 선택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자 또 다른 감동이기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내달 중국 우한에서 열릴 동아시안컵 대회에 젊은 선수들(평균나이 24.3세)을 대거 발탁했다. 최초 발탁된 구성윤과 이찬동을 비롯해 젊은 피 위주로 팀을 꾸렸다. 당장의 결과보단 미래를 위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2018년 러시아에서 개봉될 또 다른 감동의 영화, 그 예고편이 다가오는 동아시안컵이다. 8월의 무더운 여름, 23명의 무궁한 가능성들이 만들어낼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우한에서 리메이크 될 감동의 이야기를 응원한다.
<사진①~⑧> 슬램덩크 북산팀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 / 편집: 정일원
<사진⑨> 동아시안컵 23인 최종 엔트리 / ⓒ KFA 인스타그램 캡처
헤럴드 H스포츠에 2015년 7월 30일자로 기고한 칼럼을 일부 교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