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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tobject Aug 03. 2021

손이 빠르다는 것

감각

"근데 마지막에 손이 빠르냐고 물어보더라고."


 디자인 회사 면접을 다녀온 친한 형이 그 회사를 선택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 역시 반감을 가졌다. 손이 빠른 디자이너가 만든 디자인이 왜 좋은 걸까. 공장처럼 빨리 찍어내는 게 과연 잘 된 디자인이 맞다고 생각하나. 다행히 난 손이 빠른 축복받은 디자이너 중 하나이지만 만약 취업을 하게 된다면 절대 빠르게 작업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리라 한번 더 다짐했다. 


 나와는 다르게 동업을 했던 친구 가을은 손이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강점이 있었다. '끝 힘'. 작업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자신의 주관에 어긋난 것들에 대해 끝까지 교정을 하는 집념이 내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 문제가 많이 되었던 것 또한 그런 성향으로 빚어진 작업 속도에 대한 문제였다. 동업을 한다는 것은 일, 돈, 시간을 누가 덜 쓰고 더 쓰는지 낱낱이 드러나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다. 가끔은 느린 만큼 결과물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한두 시간 동안 결과물이 안 좋을 수 있는 작업을 붙들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나보다 더 빠르게 해결하기도 했다. 나중 가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프로그램을 켜고 무언가를 그려내기 전에 충분한 자료조사를 했다. 난 손이 빠른 편이라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다섯 가지를 모두 그려 나열해서 비교하지만 나도 내가 만들어낸 사고영역에 갇히면 열 개든 백 개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내가 아닌 다른 곳(가을이의 아이디어나 자료조사를 통해 본 영감들)에 눈을 돌린다면 좀 더 빠르게 마무리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작업 속도가 느린 그녀의 스타일이 조금 거슬린다 해서 딱히 꼬집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손이 빠른 편이었다. 한 순간도 느렸던 적이 없다. 결국 디자인이 승인(컨펌)되는 시기는 비슷했으니까. 단지 과정에서 내가 조바심을 냈을 뿐.


 ‘손이 느리다’는 것에 부정적이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내가 디자이너를 뽑는 사장의 입장이 된다면 손이 느린 디자이너보다 빠른 디자이너를 뽑을 것이다. ‘손이 빠르다를 추구하는 생각’에 마찬가지로 부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지니스에서 디자인이 아무리 중요한 요소라 하더라도 시간(또는 디자이너를 고용해놓은 비용) 또한 그만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는 사장이라면 감각과 물리적 시간을 저울질하는 것은 당연한 역량이다.


 나는 디자이너 커뮤니티 운영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의 편에 서야 한다. 하지만 많은 주니어 디자이너들의 고민을 듣고 있노라면 마냥 동의하고 공감해줄 순 없다. 디자이너들이 모여있는 단체톡에서 떠들며 견고 해지는 그들의 옳고 그름은 업계가 발전하는데 체증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같은 업계의 사람들만 모여있다면 다각도로 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해결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 되기는 힘들다. 그래서 스스로 물음표를 던져볼 필요가 있다. ‘손이 느리면 진짜 안돼?’ 


 사실 디자이너에게 '손이 빠르다'는 말은 다양한 소양을 묻는 포괄적인 질문이다. 단지 그렇게만 물어보는 대표나 클라이언트는 정말 손이 1초에 몇 개의 클릭과 타이핑을 하느냐로 알고 있겠지만 결과물이 빠르게 나오는 데에는 여러 영향이 있다. 손이 빠르다는 것은 프로그램을 능숙히 다루는 전제하에 사고가 빠르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을 한 번에 뚝딱 그려내는 천재가 지구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스케치 - 프로그램 - 목업 등의 단계를 거쳐야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게다가 그 결과물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손이 느리더라도 디자인을 잘하는 디자이너를 뽑는 방법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디자이너 내가 감히 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본 적이 없다.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멋진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들을 보고 그들의 작업 과정을 보면 내가 아는 ‘손이 느린’ 유형의 사람들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는다. 물론 한 땀 한 땀 그려야 하는 일러스트나 복잡한 작업이 필요한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손은 느리지만 잘하는 디자이너는 사실 모순된 존재가 아닐까.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는 걸로 예를 들어서 잘 된 디자인(통과되는 시안) 명중률이라고 보자. 신중히 시위를 당겨서 쏘아 올린 하나의 화살의 명중률이 높다면(오랜 자료조사 끝에 알맞은 시안 하나) 그 디자이너는 손이 느리다고 할 수 있을까. 화살을 빠르게 여럿 쏘아 그중 하나가 명중했다면 그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걸까. 결국 두 가지 모두 결과는 좋은데. 


 우리는 구분을 잘해야 한다. ‘손이 빠르다’는 것은 사고가 빠르다는 것이다. 빠름의 종점에는 시안 확정이 있다. 결국 잘 된 디자인을 얼마나 빠르게 전달하느냐가 그들(고용주 또는 클라이언트)이 원하는 손이 빠른 디자이너이다. 듣기는 거북할지 몰라도 디자인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이 맞다. 손이 빠르냐는 질문은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면접장에서 충분히 들릴 수 있는 이야기다. 도덕 시간에 배웠던 ‘입장 바꿔 생각해봐’. 고용주와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그럼 이제 손이 느린.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디자인을 잘 못하는 명중률이 떨어지는 디자이너들의 케이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주관의 문제. 자신의 디자인에 주관이 없고 자신감이 없다. 아트보드 구석에 꽤 괜찮은 시안을 두고 그저 하라는 대로 혼나지 않을 선만큼만 한다. 또는 그 반대로 고집이 쎄서 특정 범주의 스타일 안에서만 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지연된다.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인 것인데 무서운 것은 스스로 갇혀 있는 범위를 모른다. 대체 뭘 어떻게 해오라는 거야?라는 의문이 든다면 구글, 핀터레스트를 더 켜보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의문이 생기는 프로젝트를 다른 디자이너에게 맡기면 요구에 맞는 결과물이 나온다. 


 둘째, 내가 아닌 디자인의 컨펌자가 따로 있다. 회사에 소속된 디자이너라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디자인의 컨펌자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키거나 다그치는 것이 명료해진다면 왼쪽으로 갔다 올렸다 내렸다 다시 올리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아무리 내성적이고 자존감이 낮은 디자이너라도 사수에게 보여주기 전에 스스로 컨펌을 하게 되어있다. 상급자에게 보고하기로 한 순간이 바로 스스로 승인하는 순간이다. 본인 눈에도 아닌 것은 남들 눈에도 아닌 것이니 괜히 보여줬다 돌아오는 시간을 아끼자. 


 셋째, 빠져버린다. 내가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 디자인이 나를 하는 단계(?)가 오기도 한다. 특히 동업자였던 가을이가 까끔 그랬다. 그녀의 느린 작업 속도를 탐구하기 위해 뒤에서 몰래 모니터를 염탐한 적이 있더랬다. 정말 필요 없는 움직임과 반복, 그리기. 그녀는 분명 똑똑하고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으며 딜레마에 빠졌을 때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넉살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맥과 하나가 되어 화면보호기가 된 것처럼 헤매고 있었다. 디자인에 잡아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경우는 휴식이 답이다.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한다거나 커피 한 잔 마시고 내 모니터를 보았을 때, ‘오메 저건 뭐야.’라며 정신이 차려진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모든 일에는 마감시간이 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이 아니다. 어떤 창작물을 만들던 너의 창작물이 우수할테니 영원히 작업해보라할 오너도 없다. 슬프지만 디자이너들의 움직임 밑에는 자본이 있다. 고용주는 ‘투자’를 한 것이다. 상품을 상품답게 만들기 위해서, 매력적으로 만들어 소비자(사용자)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그다음에서야 고용주와 고용자간의 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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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나 또한 스스로 생각에 잠기며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어떤 문제점을 인지하고 나면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분석하는데 특히 진상 클라이언트를 만났을 때 딜레마에 빠진다. 유독 디자이너로써, 또는 사업자로써 자존심을 긁는 말을 하는 고객들이 있다. 악의 없이 하는 말이겠고 그렇게 믿고 싶지만 어찌된 이유이건 굉장히 견디기 힘든 상대이다. 고분고분 듣고 사죄하는 성격이 아니라 도가 지나치면 적절히 대응하지만 그런다고 모든 상처가 자연치료되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데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나는 앞에 제시한 세 가지의 문제점이 모두 생겨나 버린다. 자존감은 낮아지며 내가 그려낸 수정 시안에 대한 자신감도 낮아져서 스스로 컨펌도 못하고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버린다. 조급함에 산책도 휴식도 제대로 하지 못해야하지만 그럴 때면 마감일이 코 앞이라도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밖으로 나선다. 나보다 작은 소품들과 컴퓨터, 책상들이 아니라 가끔 밖에 나가 나보다 높은 키의 나무도 보고 차갑거나 뜨거운 그 계절의 공기를 마시면 환기가 된다. 굉장히 식상한 해결방안이지만 그만한 방법도 없다. 돌아와서 조급함에 더 잘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디자이너는 경력이 오래되거나 아무리 노련해진다 해도 언제든 이러한 고통에 빠진다. 나 외에도 팀장, 대표급 경우에도 마찬가지더라. 모두에게 아킬레스건은 존재하니까. 디자인을 하는데 느리거나 빠르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직 진짜 속도를 중시하는 디자인 공장은 존재하니까. 알고 보면 결과물은 디자이너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클라이언트나 오너가 주는 방향성. 또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방향성이 명확하다면 느리게 작업물을 전달할 디자이너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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