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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tobject Mar 20. 2022

다른 시각

감각


 “이제 여러분의 눈은 바뀌어야해요.” 

 

 나의 첫 디자인 수업. 디자인 개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이상하게도 그 수업만 들으면 가슴 한켠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그게 청춘의 열정같은 것이었는지 디자인에 대한 학구열인지 알 수 없다. 단지 무언가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필요했던 수업이었다. 그 당시 해주셨던 눈이 바뀐다라는 말은 살짝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대충 까다로워 지라는 거겠지. 


 그렇다고 눈을 다르게 뜨고 사물을 본다던가, 괜히 고개를 까딱하며 맘에 안든다는 추임새같은 것을 더하진 않았다. 바뀌어야한다는 것만 알았지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 때 보다 눈이 바뀌고 난 지금 생각해봐도 딱히 설명할 길도 없었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그 수업을 들을 때와 현재의 나의 눈은 바뀐 것 같다. 이해한 것 처럼 까다로워진 것도 있지만 감각적인 또는 감각에서 벗어난 것들은 구분할 수 있으니까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쁜 학생이 있었다. 큰 눈과 귀여운 키를 가진 외모도 있었지만 그녀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꽃도 좋아했다. 이쁘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금발을 했었고 언제든 때가 탈 수 있는 하얀 것들을 좋아했다. 그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 그녀가 디자인하는 모든 것들엔 화이트와 골드가 묻어있었다. 심플하지만 화려한(?!). 눈이 불편하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이쁜 친구가 이쁜 것들을 만들었다. 시각적으로 그녀가 끌리기도 했지만 학구열에 불탔던 나는 질투 또는 동경의 마음이 조금 더 생겼다. 


 그즈음 나의 과제물은 노력은 했지만 그 뿐이었다. 오롯이 ‘노력’만 느껴졌을 뿐, 멋지다거나 이쁘다라는 감탄은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학점은 유지했지만 ‘감각’이라고 불리는 그것에 대한 고민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작고 감각적인 그 여학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학파일까 아니면 디자인 전문 학교라도 나왔을까. 나는 행동을 관찰했다. 뭐, 소름 돋게 복도 끝에서 훔쳐본다거나 밤 길을 따라가는게 아니라 단순히 친한 사이로 지냈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주하는 말이 있다. 현실적이고 미래지향, 계획적인 나에겐 ‘이제는’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 처럼 그 친구도 자주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쁘다’였다. 단순하게도 나는 억지로 그 말 버릇을 따라하기로 했다.


 이쁘다는 말 따라하기 시작. 학교 화단에 피어있는 꽃을 보고 이쁘다. 편집샵에서 본 문구도 이쁘다. 엔틱한 가구도 이쁘다. 그녀가 좋아하겠다 싶었던 것들, 진짜 이쁘다라면 이쁜 것들이었다. 어느 감각 좋은 사람이 빚어낸 결과물. 또는 위대한 자연이 만든 균형 같은 것들에 영감을 얻었다. 그렇게 모든 만물을 이쁘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다니다 어느 날 문득 뇌가 반응했다. 


“아니다.” 


 예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평가했던 심미적인 것들 보다 오히려 나와 같은 노력파가 만들어냈을 법한 것이 길거리에 걸려있었다. 이뻐해왔던 것들 중에서 특히 편애하게 되어 이쁜것들이 있었고 도저히 이쁘다는 말로 포장할 수 없는 것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에게 감각. 아니 감각이라기 보다 주관적인 눈이 생겼다.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손 보다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완성되고 나서야 나의 작품이 조금 봐줄만해졌다. 




 고등학교 나와 정말 많이 닮은 친구가 있었다. 새 학년 새 학기, 급식 줄을 서고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반 친구도 아니고 외모가 특출나지도 않은 그 친구를 스쳐보면서 ‘나와 닮았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이름에도 같은 글자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고 내가 대답하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 친구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출석부에 없었는데도. 아마 쌍둥인지 혹은 과거있는 형제인지 불쑥 궁금해졌던 것 같다. 


 2 학년 같은 반이 되면서 놀랍게도 성격이 잘 맞아 절친이 되었다. 둘 다 공부를 그렇게 성실하게 하는 편이 아니고 지능도 비슷했던 터라 적당히 놀고 적당히 공부도 했다. 각자 군대에서 살을 빼면서 외모는 달라졌지만 함께 지내온 시절이 있던 터라 사고는 이미 닮아져있었다. 그래서 졸업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도 자주 만나 놀았다. 각자의 학업을 해내면서 가끔 만나서 각자의 회포를 풀었다. 그러나 여느 학창시절의 우정이 공통사가 달라 사라지면서 함께 사그라지듯이 우리도 그랬다. 


 그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미술학원 앞 걸려진 그림들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 그림…” 아마 그림이 가지고 있던 심미성 또는 색감 등을 이야기했었겠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친구는 주접떨지말고 가던길이나 가자했다. 그래 어쩌면 노래방 가던길이 급했다거나 그 날의 온도가 너무 더워 서둘러 실내에 들어가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림을 보고 발걸음을 잠시 멈추는 사람들이 많지 않구나라고 느꼈다. 내가 생각한 가장 나 같던 사람 조차 그러지 않았으니까. 


 단연 서운하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쩝’하고 가던 노래방으로 발걸음을 돌렸지만 디자인개론 교수님이 이야기했던 보는 눈이 바뀌어야한다는 게 이런것일까 싶었다. 단순히 정말 잘 그린 그림이라는 감탄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 그림실력을 갖췄을까.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또는 어떤 주제) 그렸을까라는 궁금증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반 사람들이 이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만들어진 이유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시각적인 것 보다 탐구적인 심리 같은 것에 가까웠다. 금발의 키작고 이쁘장한 여성이 만든 결과물인 것 같은 것에 눈이 갔지만 어느 순간 나다운 것들, 내 취향의 것들에 눈이 갔다. 그렇게 ‘감각’이 아닌 ‘주관’이 생겼다. 이 주관적인 스타일이 누군가에게 ‘뛰어난 감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시절 내가 그 친구를 ‘감각적인 그녀’라고 부르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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