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설령 미움에 마음을 잠식당해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 역시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단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이 꺾여서, 그 순간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음 속에 미움이 피어난 거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미움은 태어난다. 그러니까, 미움은 갈구가 없으면 사라진다. 미움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얕은 꾀를 썼다. 자신의 양분, ‘사랑에 대한 갈구’를 더욱 처절하게 느끼도록 마음을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욕망이다. 내게 '저것'이 있다면 사랑을 얻을 거라고 믿게 만드는 것.
가증스럽게도, 욕망이 추구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미움은 끊임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갈구’하도록 만들어야 하기에, 사랑이 채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미움은 금새 훅-하고 사라져버리는 가짜 사랑을 채워 넣어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한편, 미움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은 미움에 저항한다. 몸이 병균과 싸울 때 열이 나듯, 마음이 미움과 싸울 땐 죄책감, 자괴감, 슬픔, 외로움이 밀려온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름답다. 마음을 지켜내려 온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니까.
‘묘진전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생각은 여기에서 정리가 됐다. 아름다움에서 죄책감으로, 죄책감에서 미움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었다.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오는구나. 하나의 작품을 보고 사랑에 대해 이정도로 다층적인 생각을 했던 적이 있나 싶다.
젤리빈 작가는 사랑을 믿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짐작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끄집어내더라도 어딘가에 조용히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랑이 있으니까 미움도 있는 거고, 그래서 죄책감과 슬픔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 생각들로 죄책감에 잠겼을 때 이 작품을 만났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을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혹은 괴물이 되어간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위로가 되어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