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눈으로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괜시리 마음에 심술이 생긴다. 왠지 그 희망을 한 번은 부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왜 그러는 걸까. 이런 심술은 아마도 부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나도 반짝이는 희망을 갖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다른 이들의 희망도 헛된 것이라 치부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느낌.
옹졸하고 치사한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다른 이들의 희망을 부정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희망을 갖는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런데 도무지 상황이 희망적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희망을 갖는다는 건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상황이 좋아져야 마음놓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희망이 상황과는 상관이 없는 거라면, 무엇이랑 상관이 있는 걸까?
우선, 희망을 막아서는 것을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눈을 반짝이며 희망을 얘기한다고 상상해보면..., 쑥스럽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든다. 쑥스러움이 희망을 막아설 수 있구나. 그렇다면 무엇이 쑥스러운 것일까?
일단 희망을 얘기하면 사람이 좀 순진하고 바보같아 보인다.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고, 생각이 짧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세상은 고통이 가득한 곳인데 혼자 희망을 노래하고 있으면 나만 너무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니, 근데 고통을 모른다고 부끄러워 할 이유는 또 뭔가? 왜 고통을 잘 알아야만 하는 걸까? 고통을 모르면 미성숙한 사람인가? 고통이 반드시 성장을 수반하는 것도 아닌데? 행복과 희망 안에서도 충분히 인격이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나의 쑥스러움 안엔 별다른 근거가 없었구나. 이건 그저 나를 드러낼 용기가 없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내 질투의 대상은 용감한 사람이겠구나.
그런데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를 보면서는 돈키호테의 용기에 진심으로 질투 없이 응원을 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이건 돈키호테가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질투의 대상에서 한발짝 벗어난 인물로 희망과 용기를 이야기하다니, 정말 영리한 수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는 무척이나 치밀하게 설계된 이야기다. 극 안에서 벌어지는 극, 무대 위의 인물을 다시 다른 무대 위로 올리는 구성,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를 이용해 관객을 서서히 무장해제 시켜나가는 서사… 이 모든 것들이 잘 설계된 기계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희망을 전달하는 이야기였다.
여전히 용기 없는 사람이고 질투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맨오브라만차’를 보고난 뒤, 쑥스러움을 걷어낼 조금의 용기가 생겼다. 내가 낸 용기가 많은 사람들에겐 바보 같이 보일지 몰라도 어떤 사람들에겐 희망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이런 멋진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