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nowfield Apr 25. 2024

숏 슬립퍼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점점 미쳐 가는구나

‘뇌가 멈춰버린 것 같다.’


작년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같은 생각만 하고 있다.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나는 그냥 생각이라는 걸 하면 되는데 왜 생각은 안 하고 찡찡거리는 거야’


라고 나에게 생각으로 화를 내다 다시 또다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의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무한 뫼비우스에 띠에 갇혀 버린 것만 같은 상태. 내 생각이 마치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 계속 빨래질당하는 것 같은 상태.


말 그대로 뇌가 멈췄다기보단 내 생각과 정신이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힘에 의해 정신없이 끌려다니고 있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애써 정신의 끈을 붙잡고 간신히 정말 꼭 해야 할 일만을 내가 스스로 내 멱살을 잡아끌며 해 나가는 식으로 버텨내고 있다.


내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고장 나게 된 걸까.









18세부터 29세까지 나는 지금 하는 일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해 왔다. 가끔 출근을 해서 일을 하지 않는 날

(한 달에 2, 3번 정도. 이마저도 고객의 노쇼등으로 인해 강제로 생긴 휴식이었다.)

에도 집에서 일을 했으니 말 그대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11년간 일을 해왔지.


돈이 필요해서도 아니었고,

(돈을 모으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버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책임감, 의무감, 직업의식 그 어느 것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재미있고 좋아서, 

그렇기에 잘하고 싶어서.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살기 시작한 지 몇 년 안 됐을 때 까진 주변에서 ‘빚이 있냐’, ‘소녀 가장이냐’라는 말도 참 많이 들었다. 질문을 하는 의도나 이유가 납득이 되는터라 매번 그저 웃는것으로 질문들에 답을 대신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라.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


이제 막 성인이 되어서 클럽과 술집이 합법적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입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내적 죄책감이나 압박감 없이 합법적 망나니(?)가 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술기운에 용기를 내 이성과의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도, 술기운을 빌려 솔직하거나 용감해져 볼 수도 있는 그 시기!


하늘을 바라보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마치 나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생이 무엇인지 통달한 성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그 시기!


인생을 알 것도 같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 건지는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함과 설렘, 무게감과 자유를 줄타기하는 그 시기!


중2병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인생의 전환점!


이 시기는 그런 갓 법적 성인이 된 시기인 것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서 클럽을 즐기고, 술을 마시며 헌팅과 소개팅을 해야 할 시기인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나이인 내가! 외적으로 부족하기는커녕 평균 이상인 내가! 눈 떠서 눈 감을 때까지 일만 하니 주변에서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지.


심지어 나 스스로 열심히 사는 내 모습에 취해버린 것도 불나방 같을 나이에 일만 하는 생활을 지속하는 것에 한몫했다.









난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에는 미친 듯이 빠져버리는 말 그대로 ‘덕후 기질’이 만랩인 사람이다. 아니다 삼십사만 랩 정도 되려나.


이 덕후 기질 덕분(?)에 처음 이 일을 시작하고 5년간은 2, 3일에 2시간 정도를 자며 일을 했다.


이 2시간 조차 10분, 30분씩 끊어서 잠을 잤던걸 합치면 2시간 즈음 되지 않을까 라는 계산으로 나온 시간이니까, 아무리 길어도 1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다는 소리지. 주변에서 나를 볼 때 무식하다 혹은 대단하다 싶을 정도의 생활이었다.



내가 잠을 자지 않아도 될 정도로 푸욱 빠져서 일을 할 수 있었던 비법은 


나의 일에 대한 대단한 열정!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 

으로 부단히 노력한 건 아니었고, 그것 보단 단지 타고난 체질의 영향이 더 컸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잠이 없었다.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울다가 해가 떠야지 잠깐 잠을 자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잠에서 깨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갓난아기인 나 때문에 아버지가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것이었을까?


생후 6개월도 되지 않은 나를

‘귀신 들린 년’

이라고 하며 창밖으로 던지려는 걸 어머니가 말렸다고 들었다. (이날 이후로 나는 출가하기 전까지 울지도, 웃지도 않는 아이가 되었다고 들었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보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는데 아파도 아기가 울지를 않아서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잠이 없다는 건 가정에서 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낮잠의 문제로 유치원에서 조차도 몇 번을 퇴원(?)을 당할 정도로 나는 ‘원래 잠이 없는 아이’였다.





나는 항상 잠을 오래 자는 사람을 보며 신기해했고,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는 나를 보며 신기해했다.


심지어 어릴 적의 나는 누우면 바로 잠에 드는 남동생을 보며 ‘쟤는 분명 자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걸 꺼야’라고 생각해 자는 동생을 간지럽히고 찌르기도 하며 동생의 가증스러운 잠자는 연기를 끝내버리기 위해 매일 밤 동생 깨우기를 도전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의 이 도전(?) 이후로 어느 순간부터 동생은 몽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1층 침대에서 자는 동생을 깨우기 위해 나는 2층에서 막대기로 몇십 분째 동생을 찌르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찌르는 것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동생의 반응이 재미없는 나는 이내 1층 침대로 내려가

자는 동생을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눈을 벌렸다, 코를 막았다 하며 몇 시간을 이리저리 괴롭혀보다 오늘도 역시 끝끝내 깨어나지 않는 동생에게 흥미를 잃는다.


한바탕 동생 깨우기 도전이 끝난 나는 평소와 같이 거실로 나가 비디오테이프장에서 몇 개 없는 비디오테이프 중 하나를 꺼내 든다. 무엇을 볼지 고르지는 않는다. 애초에 몇 개 없거니와 매일 밤 틀어놔서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는 경지에 도달해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나는 고요한 새벽의 시끄러움이 싫을 뿐이다.


이 새벽의 고요함 때문에 더 요란하게 들리는 시계 초침과 전기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아랫집에서 뒤척이는 소리, 길거리 고양이의 발걸음 소리,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봉지 소리, 형광등 램프가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소리, 식기 건조기의 그릇이 어긋나는 소리, 저 멀리 도로의 차 소리, 내 머릿속의 말소리와 같은 고요함에 부각되는 이 소음들을 덮어줄 다른 소음이 필요할 뿐이다.






TV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은 뒤 새벽녘에 내가 찾기 전까지는 매일 홀로 거실 구석에 가만히 있는 체리 색의 반짝반짝 코팅된 나무 좌식 식탁을 질질 끌고 온다.(이 식탁에서 아침에 가족들은 밥을 먹었었지만, 이때의 나는 아침에 잠을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 식탁에 모여서 밥을 먹는다는 것을 몰랐다. 그 때문에 난 항상 이 식탁이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식탁이 바닥에 끌리며 나는 덜덜 소리에 아랫집 사람에게 시끄러울 것 같아 걱정하고 미안하면서도 나 자신보다 무거운 식탁을 옮기기엔 다른 방법이 없기에 마음속으로 연신 ‘죄송합니다’를 말하며 또래보다도 훨씬 작고 마른 몸으로 식탁을 질질 끌어 옮긴다.


TV 바로 앞까지 식탁을 끌고 와 책방에서 가져온 스케치북과 연필을 올려놓았다. 매일 그렇듯 비디오테이프를 라디오같이 들으며, 한참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TV 방송은 오전 5시인가 6시쯤 방송이 멈추며 삐- 혹은 치지직- 소음만을 내보내기 시작하는데 이 소리가 무서워서 새벽에는 비디오테이프나 잃어주는 책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새벽 3시 45분쯤 되었을 때 침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동생이 방에서 스스로 걸어서 거실로 나온 것이다. (동생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부모님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부모님이 언제 오시는지 알아야 해서 시계를 봤던 터라 아직도 생생하게 시간이 기억난다.)




드디어! 내가 드디어 이 아이의 가증스러운 자는 척을 멈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오래 잘 수 없어’


라며 내 생각이 맞았다는 승리감에 벅차 동생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그 순간 방에서 걸어 나온 동생이 TV를 바라보고 바지를 내리더니 그대로 TV에 오줌을 싸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라고 소리치며 바로 방으로 따라 들어갔는데 그 짧은 순간에 동생은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신의 침대에서 평소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날은 부모님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내가 자는 척을 했다. TV의 흥건한 오줌에 대해선 나는 모르는 일인 것이다.(다음날 엄마가 물어볼 때 내가 본 것을 사실대로 대답했다가 즉시 오줌을 닦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호되게 혼났다)





그날 이후 새벽마다 동생은 좀비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더니 이내 어느 순간부터는 집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매일 새벽 그림을 그리다 말고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동생을 쫓아다녀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인지한 나는 그날 이후로 ‘자는 척을 하는 동생을 깨우기 도전!’을 멈추었고 그러자 동생의 몽유병은 서서히 호전되었다. 


미안하다 준.











이렇게 태어났을 때부터 잠을 안 자며 살아오다 언젠가 ‘숏 슬립퍼’라는 단어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턴 깊이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이


‘아 내가 숏 슬립퍼구나’ 


싶었고 사람들도 나를 


‘저 사람은 숏 슬립퍼’


라고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두가 내가 잠을 자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는 했으나 내가 듣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이 생활을 5년쯤 반복하니 뇌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단어 그대로 ‘말’을 걸었다는 것보단 신호를 보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처음엔 며칠에 한 번씩 머릿속에서


‘틱’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느꼈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정말 짧고 얕게 마치 간지럽히듯이


‘틱’


하고 끝나니 소리를 들은 건지 착각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방치한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인가





‘티디디딕 틱틱 파바바바박’






난리가 났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고 있다.


이 낯설고 공포스러운 느낌은 평소와 같이 짧게 끝나지 않고 마치 연주라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지속됐다.

정확히 시간을 재보지도 않았고, 내 공포심 때문에 더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내 체감상 5분가량 끊이지 않고 뇌 안에서 무언가 터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지속됐다.



머릿속에서 폭죽 축제가 열리는 동안 외부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소름이 끼쳤다.

등 허리부터 정수리까지 계속되는 소름이 타고 올라갔다. 한바탕 축제가 끝나고 사방은 고요했고 오직 놀란 내 심장이 뛰는 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이게 어찌나 쿵쾅거리던지 마치 심장이 아니라 고막이 뛴다고 느껴지는 지경이었다.


이러다 심장도 고막도 터질까 싶어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괜찮아 별일 없어 다 끝났어 다 괜찮아 라며 나를 다독인 뒤 당장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소파에 누워 잠을 잤다.






그렇게 거의 12시간가량 잤을까 내 생에 가장 오랜 시간 잠에 든 날이었다.










이날 이후부터 하루에 3시간씩 잠을 자기 시작했고 그 수면 패턴을 지속하다 29세가 된 순간부터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육체적 피로감을 심하게 느꼈고 며칠 동안 날을 새도 지장이 없던 나의 무기인 초 사이언 집중력은 온데간데없고 안개 낀 것같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자꾸 무언가를 깜박하고 단어를 까먹는 것은 기본이고 평소엔 안 하던 자질구레한 실수들까지,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이 생각에 나는 단순히


‘체력을 올리면 해결이 되겠지’


라는 판단으로 PT를 시작했다. 난생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주에 2회 50분 근력 트레이닝. 유산소조차 하지 못했다. PT가 끝나면 밥은커녕 죽은 사람같이 잠만 잤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오버 트레이닝인 거 아니야?’


싶다가도 내가 오늘 한 운동을 돌이켜보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수준이라 인터넷에 떠도는 ‘오버트레이닝’의 기준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29년을 걷지도 않고 앉아서 손만 움직이고 산 인간의 체력이 초등학생보다 월등하다는 보장이 없다)







PT를 시작하고 3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체지방만 10kg이 감량되어 있었다.

식단 조절 하나 없이 단지 주 2회 50분 근력운동 만으로 성인 여성이 체지방률 20%가 되었고 이 정도의 체중감량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안정기의 심박수는 45

운동할 때의 심박수는 210

조금만 움직여도 심박수는 160

이 심박수조차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다 운동 6개월 차에 들어선 작년 여름. 결국 심장이 선두 주자로 출발해 눈, 면역력, 호르몬, 알레르기 등의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터져서


‘사람이 아파서 통증으로도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매일 할 정도의 고통을 한 달간 느꼈다.












처음 통증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캐나다에 있었다. 캐나다에서 지낼 계획을 하고 간 게 아니라 여행을 갔다가 어쩌다 보니 비자가 생겨 장기체류 중이었던 상황이었기에 나에겐 여행자 보험조차 없었다.



응급실을 가면 의사와 눈 마주친 순간부터 1,000만 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응급실로 갔다.


정말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1000만 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패기와는 관계없이 해외의 응급실은 돈을 낸다고 검사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나는 접수를 하는 것만 6시간 대기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6시간 기다려서 접수를 하면 의사를 만나려면 며칠은 걸리겠구나!’


라는 판단이 서자마자 가장 빠른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티켓팅했다.


일주일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11시간 비행 내내 기내식이 나오거나 누군가 라면을 주문해 음식 냄새가 날 때마다 화장실에서 위액을 토해냈지만 마침내 나는 살아서 한국에 도착했고 그 길로 바로 응급실에 갔다.








이때 나는 29년 인생 처음으로 죽음을 코 앞에서 느꼈고, 처음 마주해 본 

‘인생은 유한하다.’

라는 느낌은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숏 슬립퍼가 실제로 존재하던 아니던, 적게 잤음에도 내가 피로도를 안 느끼던, 그럼에도 능률이 좋던. 결국 수면 부족은 끝끝내 오랜 기간에 걸쳐 내 몸을 망가지게 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타고나게 잠이 없는 체질이 영향을 준 것은 단지 몸이 망가지기 전까지의 기간이 좀 더 길었을 뿐, 결국은 끝내 문제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이때의 깨달음으로 인생의 전반적인 플랜과 가치관까지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은 일을 줄이고 잠을 늘리는 것이었다.


아팠던 동안 많은 시간과 돈을 잃었고, 육체와 정신적 고통도 심했지만 통증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오히려 이 계기로 남은 날들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희망참을 느끼고 30세부터 펼쳐질 내 인생이 기대되어 설렘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후에 시작이 되었다.


1년 365일 하루 평균 17시간을 일만 하고

하루에 3시간씩 잠을 자며 살던 내가


주에 3일만 일을 하고

하루에 6시간씩 잠을 자는 것으로 바꾼 이후부터.

작가의 이전글 그만한 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