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배우의 스피치와 스태프들의 이야기로 풀어보는 일과 삶의 주도성
얼마 전 열렸던 제61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백상예술대상이 대중적 흥행에만 치우치지 않고 작품성과 예술적 성취를 엄격하게 평가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매년 선보이는 특별무대는 문화예술계 안팎으로 깊은 울림과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하죠. 올해 제 눈과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순간은, 바로 작품을 만드는 스태프들이 무대의 중심이 된 ‘엔딩 크레딧’ 특별무대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한 편의 드라마, 영화, 뮤지컬이 완성되기까지, 카메라 뒤편에서, 무대 바깥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땀과 노력, 열정에 따뜻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준 무대는 그 어떤 수상 장면보다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무대는 배우 염혜란님의 진심 어린 스피치로 시작되었는데요, 그 내용 중 일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카메라 뒤에 있어서 무대 밖에 있어서 아마 여러분들이 미쳐 보지 못했을 얼굴들, 엔딩 크레딧 속 스쳐가는 이름들. 이 분들은 뜨거운 불길 속에서 칼날을 벼르는 대장장이들입니다. 제가 무대에 오를 수 있게 기꺼이 몸을 내어 받쳐주는 계단입니다. 끌어주는 손길이고, 밀어주는 힘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의 찬란한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곳을 향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항해하는 사람들, 대중문화 예술을 만드는 진짜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대 중간에는 스태프분들의 진솔한 인터뷰가 이어졌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분들 각자의 자기다움이 담긴 대답들이었죠.
“영화가 끝나서 그 크레딧을 보면 ‘아, 내가 이 세상에 영화에 표식을 하나 남겼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엔딩 크레딧은) 스태프들의 이야기가 이름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그걸 볼 수 있는 앨범 같은 느낌, 사진앨범이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나는 잘 해냈고, 잘 견디고 있다’라고, 안부를 전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솔직히 말하면 안 힘든 건 없고요… 우리를 책임져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를 던져야 할 때 무섭고 힘든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건,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거고.”
“저는 작품을 하나하나 고유한 세계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 세계를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볼 때마다 의상 이상의 가치가 저한테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서 일을 하거든요.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많은 시상식들이, 아니 어쩌면 여전히 지금도 대부분의 시상식은 일반적으로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작품 전면에 나서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고, 그들이 보여주는 연기나 퍼포먼스가 작품의 성과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다 보니, 많은 시상식은 몇몇 특별상을 제외하고는 주로 배우들의 축제가 되기 마련이죠. (백상예술대상은 배우들뿐만 아니라 희극인들도 함께하지만, 그들 역시 각자의 무대와 작품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며 대중과 만난다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넓은 의미의 배우, 즉 ‘무대 위 주역’이란 의미로 통칭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백상예술대상의 ‘엔딩 크레딧’ 무대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무대 위 주역들만의 공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수많은 스태프들의 헌신과 노력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귀한 기여에 우리의 시선이 머무를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죠. 덕분에 시상식은 단순히 몇몇 스타들만의 축하 행사가 아니라, 작품에 참여한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진정한 잔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특별무대 유튜브 영상에는 스태프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처우와 근로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수많은 댓글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가 이제는 이전보다 조금 더 보이지 않는 곳의 가치에 집중하고,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부분들을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성숙함에 이르렀다는 작은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시상식이라는 행사가 단지 화려함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가치, 즉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이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의 특별무대 장면을 통해, 개인의 ‘자기다움’이 건강한 ‘주도성’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조건과 방법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풀어가 보려 합니다.
첫째, 내 일의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고 부여할 때 주도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스태프들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는 각자가 자신의 일에 대해 부여하는 고유한 의미였습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표식을 남기는 일’ 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하나의 세계를 짓는 사람’ 이라고 자신을 정의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을 넘어, 나 자신에게 혹은 세상에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정의 내릴 때, 우리는 그 일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집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일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만들고, 어떤 영향을 주고 싶은가?”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에 대한 목적의식이 생기고 이는 곧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주도성의 첫 번째 씨앗이 됩니다.
둘째,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기여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스스로 ‘인정’할 때 주도성은 힘을 얻습니다. 염혜란 배우는 스태프들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의 찬란한 빛’이자 ‘진짜 주인공’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노력과 기여가 타인에게, 그리고 조직에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경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외부의 인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인정’입니다. 스태프 중 한 분은 엔딩 크레딧을 보며 ‘내가 잘 해냈고, 잘 견디고 있다’고 안부를 전하는 일처럼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수고와 성과를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이죠. 이처럼 내가 하는 일이 비록 전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팀과 조직의 목표 달성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여에 대해 스스로 “잘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인정은 내면의 자존감을 높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역할을 확장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주도성의 밑거름이 되겠지요.
셋째,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연결감이 주도성을 지속 가능하게 만듭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돼서 일을 하거든요”,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스태프들의 말처럼, 개인이 고립되어 있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연결감’과 ‘소속감’은 주도성을 발휘하는 데 있어 안정적인 지지기반이 되어줍니다. 나의 ‘자기다움’이 팀의 ‘우리다움’ 속에서 존중받고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개인은 더 용기 있게 자신의 역량을 펼치고 새로운 도전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자기 확신이 주도성의 불씨를 지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안 힘든 건 없고요…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건,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거고.” 이 말에는 외부의 조건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적 동기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일이 즐거울 수만은 없지만, 그 일의 핵심에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요소, 나의 ‘자기다움’과 깊이 연결된 무언가가 있을 때, 우리는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그 일을 계속해 나갈 힘을 얻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내가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어떤 부분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나요? 그 핵심 동기가 바로 나의 ‘자기다움’과 연결된 지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진짜 이유’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힘든 상황에서도 주도성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백상예술대상의 ‘엔딩 크레딧’ 무대는 결국 ‘자기다움’을 가진 개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을 때, 얼마나 강력한 ‘주도성’을 발휘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감동적인 사례였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과 일터에서도 이러한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https://youtu.be/dgKHzIvvKQE?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