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무라카미 하루키
외둥이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동창회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동창회에 가지 않는 이유는
과거로 돌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말 못할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답변했다.
나도 비슷한 이유로 동창회에 안 나간다.
특별한 이유나 목적도 없이
굳이 과거의 사람을 만나는 게 내키지 않는다.
로맨티스트들은 첫사랑 만나러 나간다지만
나는 첫사랑도, 두번째, 세번째 사랑도
동창회에 없다.
몇 년 전, 20여년 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동창은 우리가 20대 때 한 번 만났다는데
나는 도통 기억이 없다.
이놈의 네이버 밴드가 화근이다.
느닷없이 중학교 동창밴드가 활성화 되더니
누가 어디에 사는지 파악됐다.
다들 아저씨, 아줌마 돼가지고
한창 아이 키우고 먹고 살기 바쁜데
뭔 놈에 동창모임을 하려는건지
그러다가 눈 맞고, 바람 나고,
이혼하고 그라는기다.
나는 깡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드문 경우다.
시골 중학교라 서울수도권에
살고 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불행히도 고만고만하게 지낸 동창 하나가
경기 남부 신도시에 살고 있었다.
가까이 살아서인지
그 동창이 덜컥 만나자고 제안했다.
나도 대뜸 수락했지만
만나기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연락하고 지내던 고향친구에게
셋이 같이 보자고 했는데
고향친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면서 힘들었던 학창시절 떠올리기 싫다며
동창밴드에도 끝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둘이 만나서 무슨 얘길 해야하나?
사반세기 이야기 보따리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나의 20대, 30대를 어떻게 보냈는지 털어나야 하나?
서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 겨우 중학교 같은 반 1년인데
그 기억마저도 색이 바래서 사라질 지경이었다.
살면서 그 동창의 안부는 궁금해 하지도 않았었다.
20여 년만에 만난 동창은
대학원을 두 번이나 다니며
공부, 공부, 공부로 점철된 20대를 보냈다고 했다.
남편도 국내 굴지의 회사 부장이라 하고
주재원 가족으로 중국에서 지내다가
잠깐 한국에 들어온 거라고 했다.
살고 있는 경기남부 신도시 OO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얘기만 들어도 나보다 재산 수준이 월등히 좋았다.
나도 지기 싫어서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나중에는 서로 약간 기싸움 같은 대화가 구질구질하게 이어졌다.
동창 친정언니가 잠실에 산다하길래,
’울 친정언니도 강남에 살아.’
유치하지만 이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25년만에 만난 동창과 3시간 동안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 1시간은 정말 곤욕이었다.
내가 절에 가서 젓갈 얻어 먹을 조금의 눈치라도 있었으면
후딱 일어났을텐데.
동창은 8살 아이까지 데리고 나와서
대화에 집중하기가 더 힘들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아무말대잔치로 무마했는데
집에 와서 머릿속이 안개가 낀듯 자욱했다.
난 왜 그 동창 앞에서
솔직하고 쿨하지 못 했을까?
자격지심인지 내가 자존감이 낮은건지
며칠 동안 괴로웠다.
그 동창 아이에게 1만원짜리
문화상품권을 챙겨주었는데
고맙다고 카톡 한 번 주고 받고
20여 년만의 일회성 만남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동창은 어릴 때보다
더 별로로 변한 나를 보고 실망했겠지.
내가 불쾌한만큼 그 동창도 불쾌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동창을 굳이
과거에서 끄집어 낼 필요가 있었을까?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운 것도 있다.
돌이켜보면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면
일회성으로 끝난 게 다반사였다.
오히려 좋았던 추억에 스크래치를 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몇 년 전에도 어떤 모임에 20년 만에 고딩 동창이 나왔는데
서로 '누구 아니? 누구 아니?'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친구 이름을 10명쯤 말했나?
지도 알고, 나도 아는 공통분모 찾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교집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현타가 왔다.
그 동창은 학창시절 뒤에서 좀 놀았다고,
"나는 그런 쪽 친구들은 잘 몰라."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래, 우리 각자의 삶에 집중하자.
국제학교에 다닌다는 동창 딸은
A Twosome place 를 보고
영어가 이상하다길래
나도 어디서 이상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그 동창은 전직 중학교 영어선생님이었다.
그런 영어선생님 앞에서
대화 중에 '빅픽처'라는 말을 섞어 썼다.
너무 부끄럽다.
큰그림이라고 할 걸.
디지털이 너무 발전해도 문제다.
SNS, 네이버 밴드 이런 것만 없었어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추억 속 사람들인데,
다시 눈 앞에 불러내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가 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