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 슈트만 인기지? 우리나라는 못 만드나?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지인들이 물어봅니다. 우선 답변 먼저 드리자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뭔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다 있냐고요? 단답으로 Yes or No라고 하기엔 너무 복잡한 양국의 문화적 차이가 많이 깔려있거든요. ^^;;; 제가 아는 선에서 조금씩 설명을 풀어볼게요.
일단 ‘반일 감정도 심한 한국에서 왜 일본의 슈트가 인기인가?’에 대한 글은 지난번에 남겨두었으니 이전 글을 못 보신 분이 계시다면 그거부터 확인 부탁드려요. 일본의 슈트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아주 단편적인 역사에 관해서 짧게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이제는 제품의 품질 그 외 문화적, 그리고 사후 관리, 더 나아가 업계와 미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일본에는 웻슈트 공업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웻슈트 협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 같아요.(참고로 이 단체와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도 그냥 조사해 본 걸 알려드리는 거예요.) 홈페이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이 단체에 대해 상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 살펴보면 단체는 헤이세이 원년(平成元年) 발족했다 하니 1989년 시작, 약 35년 정도 된 단체입니다. 조직은 크게 사업부와 환경 대책부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재미있어 보이는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면 치수 재단 기술 위원회, 수성 접착제 위원회, 스펀지 위원회, 폐기물 위원회가 있겠네요. 그들은 이런 위원회를 구성하여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치수를 잴 것인가를 연구하고 업데이트하며 회원들과 공유하고 일반인들에게도 전파합니다. 실제로 계속해서 일본 전역에서 ‘치수 재기 세미나’를 개최 중에 있어요. 그 업데이트된 치수 재기 방식을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공유합니다. 그만큼 날이 갈수록 신체의 곡면에 더 가까운, 더 틈이 적은 슈트를 만들 수 있겠죠. 또한 스펀지와 접착제, 폐기물 위원회는 다시 말해 네오프렌 소재를 더 발전시켜 높은 접착력을 가지고, 인체와 환경에 해가 덜 가는 방안을 고심하는 부서라고 유추됩니다.
한국에도 수많은 슈트 기술자가 있고 브랜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관이 있나요? 단체가 있다면 이러한 활동을 하나요? 이러한 활동을 한다면 대중들에게 그러한 활동에 대해서 공유하나요? 일본 잠수복 공업회에는 약 30여 개의 슈트 관련 업체들이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중 제가 취급하는 브랜드는 없네요. ㅠ,.ㅜ 이것으로 제가 취급하는 브랜드를 광고하려고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브랜드 중 위 단체에 속한 브랜드는 래쉬, 맥심, 비웻 정도가 있겠네요. 오히려 타사 브랜드를 격상시켜 드리는 것으로 오해를 잠식시키고자 합니다. ㅋ
몇 년 전 양양에 영업을 온 모 국내 슈트 브랜드 관계자를 우연치 않게 만난 적이 있었어요. 이제까지 다이버들을 위한 슈트를 오랜 시간 만들어왔던 회사였고, 그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근 서핑이 붐이기도 하니 서퍼들을 대상으로 한 서핑용 웻슈트를 개발, 판매하고자 한다.” 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내용이 제가 서두에 남겼던 질문에 대한 일부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에도 물론 오랜 시간 제품을 개발, 생산해 온 업체들이 많이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 이와 같이 서퍼들을 ‘새로운 슈트 구매자’ 정도로 바라볼 뿐이지. 앞으로 그들의 업계와 마니아층, 소재의 개발, 환경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고민해왔는지에 대해서 저는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저는 그 업체의 관계자에게 “오랜 시간 잠수복을 만들어온 회사이니만큼 제품의 퀄리티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핑이라고 하는 새로운 업계에서 세일즈를 시작하는 신입의 입장으로, 단지 제품을 판매하는 것만이 아니라 업계에도 어느 정도의 서포트를 취하고자 하는 스탠스를 보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전달한 적 있습니다. 이는 평생 액션스포츠를 즐겨온 제가 이 업계에서 배운 최소한의 도리이자 윤리입니다.
해외 모 스케이트보드 브랜드에서 “우리는 스케이터들에게서 번 돈을 스케이터들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라는 취지의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이게 뭐야. 당연한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회사는 서퍼들을 통해 번 돈을 다이버들에게 사용하고, 어떤 이들은 스케이터들에게서 번 돈을 술자리에서 탕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서핑 회사는 서퍼들에게서 번 돈을 서퍼들을 위한 축제나 대회를 개최하는 식으로 환원하기도 하고, 그러한 활동들로 인해 서퍼들에게 인정받아 선택받아 마땅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도 하죠.(퀵실버, 빌라봉, 립컬 등 셀 수 없지 많지요.)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브랜드에도, 개개인에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그 브랜드는 이후에도 서퍼들을 위한 그 어떤 마케팅이나 지원을 하지 않은 채 제품을 출시했고, 이제까지 제품을 잘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품을 론칭한 지도 수년이 지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듯 지인들 중에서도 그 브랜드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저는 이런 제품을 선택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업계를 지키는 아주 최소한의 행동 양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한국에 슈트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 브랜드는 아주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아직 제대로 서퍼들을 바라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진실을 판단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최소한의 절차와 기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게이트키핑’이라고들 하더라고요. 용어가 어찌 되었든 간에 게이트 키핑, 아니 더 나쁘게 표현하자면 텃세를 부려서 진심을 확인해야 게이트를 통해 당당하게 내부로 들어온 브랜드들은 앞으로 더욱 편하고 공고히 업계 내부에서 멋진 활동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경계가 없어 아무 때나 누구나 들어왔다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나가고를 반복하는 진흙탕같이 되어버리는 시장이 아니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뇌피셜로 점철되어 있지만 저는 일본 슈트 공업회의 브랜드들이 그 게이트키핑을 통과해 살아남은, 그리고 진실을 증명한 브랜드들이 게이트 밖의 브랜드들에게 자신들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단체이자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보고 지향점이 같은 브랜드나 마니아들은 그들을 지지하고 방향이나 브랜드를 선택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곳을 향해 가겠죠. 네오프렌에 본드를 바르고, 재봉질을 해서 슈트를 만드는 것. 한국도 중국도 할 수 있습니다. ‘제조’란 제품을 만드는 과정 중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그 제조된 제품에 단순한 물건 이상의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저는 그것이 현재 일본 슈트가 가진 가치이자 차별점이고 당분간은 쉽사리 쫓아가기 어려운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