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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l 21. 2020

#2. 건널 수 없는 세계

곡하는 소리가 가득할 줄만 알았다. 오열하거나 실신하는 이를 볼 것이라 짐작했다. 그곳에 가기 전부터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곡을 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슬픈 표정을 짓는 이는 있어도 입 밖으로 울음을 토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웃고 있는 이도 있었다. 망자를 보내는 슬픔이나 회한을 찾기 힘들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를 태워 갠지스(Ganges) 강으로 흘려보낸다는 인도의 바라나시(Varanasi) 화장터의 모습이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한 이곳이 화장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시체를 태우다 까맣게 그을린 장작 더미와 거기에서 올라오는 메케한 연기, 그리고 묘한 냄새뿐이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하얀 천으로 꼼꼼히 감싸진 시신이 건장한 성인 남성들의 어깨에 들려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곳에서 일하는 것을 짐작되는 이들은 허리 높이까지 쌓아진 장작 더미 위에 새롭게 운반된 시신을 올렸다. 그리고는 까마득한 오래전부터 꺼지지 않은 채로 타올랐을 불씨를 시신으로 옮겨왔다. 어떠한 장벽이나 가림막이 없는 강둑에서 고인의 화장이 시작되었다. 망인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고, 여행자들이 그 모습을 보더라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오고 가는 모든 이가 자연스레 들릴 수 있는 동네 골목 어디쯤인가 싶은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인도인들은 성스러운 강인 갠지스 강물에 유해를 뿌리면,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끊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가까운 이가 죽었지만, 죽은 이에게는 지긋지긋한 윤회를 끊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 갠지스 강으로 왔으니 마냥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무거운 슬픔이 없는 탓에 누구라도 잠시 들렀다 슬픔을 나누고 가면 그만이었다.     


통곡이 없는 화장터가 낯설었지만, 조용히 구석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자욱한 연기가 화장터에 가득해 숨쉬기 불편했으나, 그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다음 차례에 태워질 시체가 운구되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몸집이 작은 것으로 보아 어린아이로 추측되었다. 약간의 기다림 후에 단단히 쌓은 장작 위로 시체가 놓였고, 늘 해왔던 것처럼 다른 시체를 태우던 불씨를 옮겨와 곧 먼 길을 떠날 아이의 시신에 불을 붙였다. 초연한 모습으로 그곳을 지키던 가족 가운데 유독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이가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이의 엄마였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도에서조차, 어린 자식의 죽음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뿌옇게 사라지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연기 속에서라도 아이의 마지막 흔적을 찾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그녀와, 점차 재로 변해가는 아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세계가 있었다.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초월 불가한 시간이 존재했다.    


그런 시간을 견뎌온 이가 나에게도 있다. 우리 엄마였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내가 17살, 동생은 고작 13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그 일이 있던 날, 엄마는 할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외출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다리 치료를 위해 서울에 잠깐 올라오셨고, 엄마는 할아버지의 병실에서 잠을 자며 곁을 지키다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집에는 아빠와 나, 어린 동생만이 있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동생은 잠에서 깨어 두통을 호소했다. 아빠와 나는 대수롭지 않은 통증이라 여겼다. 나와 동생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으레 있었던 일처럼 이번에도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질 가벼운 두통이라 믿었다. 아빠가 동생을 다독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의 호흡이 이상해졌다. 뒤늦게 위급한 상황임을 깨달은 아빠와 나는 119에 신고를 했다. 3층에 살고 있던 나는 잠옷 바람으로 1층 현관에 내려가 혹시나 우리 집을 찾지 못할까 봐 발을 동동 거리며 구급 대원을 기다렸다. 구급 대원이 도착했을 때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펑펑 났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원일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힘없이 축 처진 채로 아빠의 등에 업혀 나가는 동생의 모습이 내가 알던 동생의 모습을 본 마지막이었다. 동생은 구급차에 실려 부랴부랴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이미 사망한 후였다고 한다. 허무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나와 아빠가 행동을 달리했다면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후회는 그 후로 나를 따라다니는 업보가 되었다. 손가락 어디쯤 깊숙이 박혀 내내 나를 괴롭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영원히 뺄 수 도 없는 가시로 남았다. 그것은 나보다 아빠에게 더욱 큰 짐으로 남아 아빠의 생에도 그림자를 지게 했다. 나 역시 위기의 순간에 미숙하게 대응해 동생을 살려내지 못한 17살의 나를 용서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 나를 용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급하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마에게는 사고 당시 동생 곁에 없었다는 사실이 한이 되어 심장에 사무쳤다. 엄마는 한동안 꽤나 힘들어했고, 집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죄지은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가 죄인인 것처럼 스스로를 탓하던 시간이었다. 가족 모두 동생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을 힘들어했고,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동생의 이름은 한동안 누구에게서도 불려지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슬픔에 갇혀 있던 때에, 가장 먼저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엄마에겐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건 홀로 남겨진 자식인 나였다. 늦은 사춘기를 겪던 아직 어린 내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엄마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을 것이다. 자식을 먼저 보낸 거대한 슬픔은 저 아래로 묻어두고, 눈 앞에 놓인 남은 한 명의 자식을 지켜내기 위해 엄마는 그때부터 하루하루를 처절하게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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