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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May 21. 2020

작은 거인의 한 마디 '나는 반대한다'

영화 <나는 반대한다>(2019)

 


 ‘나는 반대한다’는 살아있는 영웅, 평등을 위해 싸운 챔피언. 세상을 뒤집은 위대한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말로 모든 소개를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 누구나 앞선 소개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60세에 미국의 대법관이 된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사회의 성차별을 없애는데 앞장섰고 그의 그러한 행동은 많은 이들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그로 인해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관행이라는 성차별이 드디어 ‘성차별’로 여겨졌다. 사회에서 배재되었던 여성들이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지금 보면 당연한 것들을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는 초석을 만든 것이다.



 여성들은 점점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그 권리를 인정받고 있다. ‘나는 반대한다’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통해 사회에서 여성들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다 보면 여성들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로 변화해가는 지금의 상황과,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까지의 많은 여성들의 노고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추구하는 ‘페미니즘’이 잘못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한 역경들이 우리의 미래를 더 긍정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것만으로도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를 보며 씁쓸한 감정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움직임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엔 여성을 향한 차별이 만연하다. 사회엔 인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의 여성 혐오가 존재하며 그러한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훌륭하고 뛰어난 여성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인정받는 여성들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여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이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려면 수많은 타인의 희생과 배려가 필요하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많은 가정에선 상상조차 못 할 ‘남편’의 지지를 받았다. 만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남편이 그의 직업에 대해 존중하지 않고 지지하지 않았다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대법관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 사회의 구조 하에서 여성들은 단순히 꿈을 꾸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목표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으며 인정받을 수조차 없다. 같은 노동을 해도 성별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적은 돈을 받으며 위기 상황에서 해고의 대상이 된다.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여성의 힘이 필요하다. 가정에서 여성이 남편과 동등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도움’이 아닌 타 여성의 ‘노동’이 필요하다. 다른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이상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일을 할 수는 없다. 다른 여성의 노동이 있다 하더라도 육아 등에선 여성이 남편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는 여성들이 받는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나라의 뜨거운 감자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동시에 남성들에겐 열렬한 폄하의 대상이 된다.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82년생 김지영’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보다 더 심각한 사회의 차별에 대해 역설한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여성들의 고통을 무시한다. 배부른 소리를 한다며 자신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설명하며 입막음하려 한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여성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주장하는 이기적 발상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남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은 그들의 오만한 오해에 불과하다.



 

 고통을 받고 차별을 받는 누군가에게 ‘나도 고통을 받고 있으니 입을 다물으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함과 차별에 맞서지 않고 그를 감수하고 묻어두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별에 관련한 차별은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는다. 여성의 해방은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남성들이 자신들의 받는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군대’ 또한 여성을 차별한 과거 사회의 결과물이다.



  만일 과거 사회가 여성을 남성들과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여겼다면 국방의 의무 중 군대에 가는 일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짊어졌어야 할 의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여성들을 사회에서 배재하고 사적인 영역에 여성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는 사회의 모든 권리를 남성들이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회의 모든 의무 또한 ‘남성’이 짊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그와 같은 사회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얘기하며 자신들의 고통을 근거로 여성들의 해방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그는 절대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무시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남성들이 받는 차별은 여성과 남성이 연대하여 성차별을 없애야 함에 대한 근거가 된다. 남성들이 받고 있는 차별이 있다면 남성들 또한 연대하여 투쟁하면 된다. 여성들의 차별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는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반에 대한 보장이 철저히 이루어진 사회다. 따라서 남성들은 여성의 해방이 자신들의 권익에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현대 사회를 덮치는 거대한 물결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의 구성원도 그 물결을 무시한 채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폄하하는 사람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던 여성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역설할 것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모든 인권 운동은 이타적이며 이기적인 행위이다. 자신의 사회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결국 사회 속의 권력을 위한 투쟁에 해당한다. 권력과 연관된 투쟁은 언제나 살벌한 대결과 공격, 분노, 경쟁심, 질투, 좌절감과 같은 감정을 동반한다. 여성들도 그러한 감정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투쟁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분노할 것이며 좌절할 것이다. 때로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을 상대로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거나,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페미니스트를 만나 그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는 일을 수없이 겪을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과 좌절감과 같은 감정에 휩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격동의 감정이 신념을 꺾을 수는 없다.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는 나와 우리의 사회적 행복을 위함이다. 신념을 위한 행위에는 어디까지가 바람직한 행위인지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행동의 한계 또한 없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옳다는 방식으로 꾸준히 행동하며 연대하는 것만으로도 이타적 존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해방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또한 자신의 평생을 다해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또 다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이며 앞으로 수많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사회에서 여성의 해방을 외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사회의 차별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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