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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빙 May 30. 2021

집이라는 환상의 틀을 깨며, 공포영화와 집에 대하여

영화<컨저링> 시리즈및 <허쉬> 리뷰



 

 집.

 이 한 글자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있는 걸까. 의, 식, 주라는 삶의 필수 요소에서 식만큼 필수적이지만, 식보다는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일 것이다. 집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다. 원시적 의미 그대로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는 공간, 아니면 잠을 자는 공간, 혹은 휴식과 안전의 공간,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장 작은 집단인 가정을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겐 부의 지표나 계급 상승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요, 누군가에게선 재테크와 투자의 대상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집은 적어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무언가가 돼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암묵적인 룰과 같이 여겨진다는 점이었다.

 

 아우 지긋지긋하다, 이사 가야지 원.


 오래된 단독 저택에서 일 평생을 산 우리 가족은, 엄마의 저 말을 질리도록 들어왔다. 매번 관리해줘야 하는 불편함. 철마다 개조, 수리 공사. 이사를 하지 않아 쌓이기만 하는 짐 등... 엄마에게 집은 아주 오랫동안 골칫덩이였다.

 누군가에게 집은 구속의 공간이다. 코로나 시대에는 특히 더욱. 누군가는 재택근무로 가족 간의 시간이 늘고 삶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5평짜리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방에서만 종일 갇혀있어야만 하는 이들과 서재, 침실, 넓은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사는 이에게 코로나 시대는 전혀 다른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자가격리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어떤 인도 의사의 글은 비단 인도에게만 통용되진 않을 것이다.

 집이 안정과 휴식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건 특권이다. 가정폭력이 행해지는 가정의 집은 폭력과 학대의 공간이다.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의 집은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의 기폭제가 된다.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겐, 탈출해야 하는 공간이다.


 집에 대한 인식은 강요된 가장 강력한 환상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공포 영화에서 집은 단골 소재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안전하다고 믿은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 요소로 느껴지나 보다. 집이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공간인 만큼, 집이 위험한 공간이 되는 순간, 사람을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된다. 이 넓은 세상, 두 땅에 내 한 몸 뉘일 곳 없는 서러움은 얼마나 쓸쓸한지. 영화 속의 수많은 주인공 들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공간인 집을 보며, 패닉에 휩싸이고 어디로 갈지 몰라 막막해한다. 가정은 붕괴되고 해체 직전까지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 영화가 그렇듯, 아니 적어도 내가 본 영화(숨바꼭질 같은)에서는 이런 위기는, 가족 간의 사랑으로 극복되고 연대를 이끌며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사람들은 공포와 스릴러가 주는 카타르시스와 짜릿함을 즐기고, 주인공이 그런 역경을 이겨낼 때 그런 감정은 극대화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역시 아쉽다는 생각은 든다. 집이 사실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오히려 가장 인간에게 취약하고 불안한 공간일지 모른다는 화두는 던지면서 그 해결은 가장 보편적인 인식으로 회귀하는 걸까.

  그나마 보편의로의 회귀의 방식은 동서양이 다르다. 서양의 경우에는 누구나 예상하듯, 악마나 악의 존재가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고, 하느님과 성경의 힘으로 퇴치하는 전형적인 구마물이다. 반면 동양은.... 글쎄 가족 해체, 원한에 의한 복수, 혹은 파멸, 아니면 가부장적 질서의 가정의 회귀랄까?? 사실 악마라는 존재를 제외하면 큰 차이는 없는 듯 했다.


<장화 홍련>과 <주온>의 설정은 가부장제와 집의 환상에 대해 가장 잘 풀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장화홍련과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주온 모자이다. 작품의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별개로, 두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애초에 완벽한 가정이란 환상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겐 완벽한 가정이란 없다고 생각하며 그로 인해 발생한 비극은 봉합은 할 수 있을 망정 돌이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떨 때는 봉합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특히 주온의 경우는 완벽하게 후자이다. 시리즈 대대로 나오지만, 주온은 해피엔딩이 없다. 무차별적인 저주 남발이라는 방식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유독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짙은 일본에서 '아이를 키우기 완벽한 집'의 가부장에게 살해된 모자 원혼과 누구도 그 원혼을 풀 수 없다는 설정은 유의미하다 생각한다. 하도 곰탕처럼 우려서 그렇지...

  어쩌면 집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연결되는 것, 집이 단순한 공간을 넘어서 가장 작은 사회적 집단인, '가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성애와 공포영화의 결합은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모성신화는 공포까지 이어지는 걸까


 컨저링 시리즈도 사실 이 문법에 충실히 따르는 영화 중에 하나였다. 적당한 클리셰와 실화라는 설명을 덧붙여 주는 호기심에, 공포심을 극대화한 적절한 연출, 그리고 실존인물을 사용하여 정말 있었던 일인가? 싶은 공포감도. 그리고 결말도 클리셰적이다. 내가 컨저링을 잘 보며 안타까움에 탄식을  부분은, 악령에 휩싸인 어머니가 딸을 죽이려 할 때 미스 워렌의 외침을 듣고 멈칫한 부분이었다. 모성애와 악의 굴복은 너무나도 전형적 조합이었다. 속으로 윽 하는 탁식이 들을 정도로. 이건 컨저링 2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컨저링 2에서는 1보다 더 열악한 집이 배경이다. 낡아빠진 집, 물이 콸콸 새는 지하실.... 양육비를 안주는 전남편과 그런 현실에 자식에게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어머니까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안위를 위해 사건을 받지 않으려는 워랜 부부와 내 집이라면서 앉은자리를 떠나지 않은 영혼까지. 정말 현실적 접근이었으나 영화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보편적인 관념으로 이를 풀어냈다.

 엄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울부짖고, 아이를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며 우리를 구해주세요 하고 울부짖고, 아이는 가족을 죽일 거라는 말에 악령의 말대로 거짓을 고한다. 그 낡은 소파를 차지한 할아버지도 그렇다. 죽고 나서 찾아온 이유가 자신의 가족을 보고 싶어서라니.......... 이쯤 되면 거대한 가족애에 대한 환상을 빈틈없이 꽉꽉 채운 느낌이었다. 어쩜 이럴 수가! 클리셰와 익숙한 것은 한 단계 비틀어 생각하는 나에겐 얼마나 아이러니한 영화인지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본 영화 허쉬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지만 조금 달랐다. 허쉬에서도 집은 안전한 공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주인공과 범인마저 집은 아주 일시적인 회피 수단일 뿐, 영원히 방어해주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방공호가 아니다. 콘크리트로 지은 집도 창문을 깨부수면 침입할 수 있는 판에 나무집인 미국 영화의 집은 더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허쉬의 다른 점은, 허쉬의 주인공은 철저히 혼자라는 점이다. 허쉬의 주인공은 사회로부터 자발적으로나 타발적으로 격리된 인물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심지어 받을 수 마저 없다. 의논할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자신 속의 목소리일 뿐. 그렇기에 오히려 허쉬의 집은 안정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해방이다. 컨저링이 전형적인 평화-> 위기-> 평화로 돌아간다면, 허쉬의 집은 평화로 위장된 구속-> 해방의 공간이다. 컨저링에선 꼭꼭 잠기던 문들이 허쉬에선 '수시로, 자발적으로' 열리고 닫힌다. 두 영화에서 집을 다루는 방식이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대적자가 악마인 컨저링과 살인마가 나오는 허쉬를 비교하는 건 너무한 처사이기는 해도.....


 사실 집 하면 또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더 있다. Don't Breath, 한국 번역명 맨 인 더 블랙이라는 영화인데 여기서도 집이 상당히 재미있는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 있는 집은 말 그대로 보물창고랄까. 비밀이 깊게 묻힌 공간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은밀한 어둠 속 공간, 탈출할 수단이 없다는 공포심은 아주 생각할 만한 거리를 많이 준다. 심지어 여기는 자기 집이 아니다. 남의 집으로 들어간 침입자가, 외려 그 집을 탈출하고자 발버둥 친다는 점에서 군데군데 재미있는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영화로는 패닉룸이 있다. 집 내부에 범인과 주인공들이 같이 나오긴 하지만, 안전하다고 생각한 공간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건 비슷하다. 여기는 안전을 위한 방공호같은 공간이라는 점에서 '안전'이 더 극대화 되었고 그만큼 그 안전한 공간의 반전요소가 더 크게 나온다. 물론 이것 뿐은 아닐것이다. 집에 관한 공포영화 소재는 무궁무진하니까...우먼 인 블랙도 있을테고...


 영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위에 언급된 영화들은 각각의 리뷰를 디테일하게 쓸 예정이다. 특히 허쉬는 바로 다음 타깃이다. 허쉬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주 쓸 말이 많은 영화다.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했고...


 결국 주저리 주저리 썼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코로나 시대, 자가격리가 권장되는 시기에 집이라는 소재가 공포영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그리고 결말에서 그 위기와 결핍과 불안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조금 더 주목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객도 제작자도. 가장 평온하고 안정된 공간 이어야 하는 집, 가정이라는 인식이 현실과 얼만큼 괴리되어 있고, 어떻게 작용되는 건지. 혹시 그 보편적인 인식이 허상이나 특권은 아닐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불어 우리 막내 동생이 부디 나에게 방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그만 화를 내주길 간절히 바라며 글을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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