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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미 Sep 22. 2022

엄마, 천천히 더 천천히

채훈아, 안녕? 오늘 엄마는 저녁 7시가 되었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걸 보면서 '이제 해가 많이도 짧아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가을의 한복판에 있는데 엄마는 아직도 여름을 살고 있었던 것 같아. 익숙했던 반팔 옷들을 넣어두고 이제 긴옷을 챙겨야겠지. 벌써 9월 하순이란다.


며칠 전에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다가 채훈이가 엄마에게 한 말 한마디가 마음속에 오래도록 꽂혔단다. "엄마, 너무 빨리 가잖아. 엄마가 그렇게 빨리 가면 나는 뛰어야 된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생각했어. '아 그랬구나. 내가 너무 빨리 갔구나.'


동생 윤재가 태어나면서 엄마의 분주한 일상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었어. 가만히 누워 방긋방긋 웃던 아기가 이제는 집 전체를 종횡무진하면서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탐색하다 보니까 엄마는 1인 3역, 아니 1인 4역 이상을 해내야 하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어. 엄마도 두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이다 보니까 아이 한 명을 키우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육아에 아직도 놀라고 여전히 적응하는 중이야.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아침 시간.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준비해서 채훈이가 등원버스를 놓치지 않고 타는 것, 이게 엄마에게 매일 주어지는 고난도 미션이란다. 언젠가부터 '빨리 해. 버스 늦겠다.' 이 말이 입에 붙어버렸어. 엄마의 재촉으로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10분만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면 훨씬 여유가 있을 텐데, 매일같이 발을 동동거리며 조급하게 등원 준비를 하게 되었지. 그러다 보니 유모차에 윤재를 태우고 빨리 나가느라고 채훈이 너를 살피지 못했던 것 같다. 


너의 말을 듣고, 너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 보았어. 엄마와 함께 보폭을 맞춰 걷고 자주 눈 맞추고 여유 있게 산책을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빨리 빨리'의 일상을 사느라고 엄마의 뒷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을 너를 상상하니까 파도처럼 미안함이 밀려왔어.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것 같은 마음에 화도 나고,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닦달하는 엄마가 낯설고 숨막히기도 했을 거야. 기다려주지 못하고 무심하게도 빨리 걷는 엄마를 뒤따라오느라 얼마나 숨이 찼을까.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는 이제 조금만 더 천천히 하기로 마음 먹었어. 10분 더 일찍 준비하면 일어날 기적을 믿어 보려구. 감시자처럼 너의 동선을 쫓으며 빨리빨리 하라는 말 하지 않고, 네가 여유를 갖고 스스로 밥 먹고 옷 입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해. 불안하고 정신없는 아침이 아니라 편안하고 즐겁게 맞이하는, 기대되는 아침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말이야. 


엄마가 좀 더 천천히 갈게. 천천히 하면 볼 수 있는 것들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아질 테니까. 내일 아침 등원길에는 네가 좋아하는 개미를 한번 관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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