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매 이야기 5
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긴 했지만,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실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크게 기침을 하다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업고 아빠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바로 중환자실로 들어갔고, 나는 역시나 그 사실을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를 데리러 온 아빠가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10월 중순 즈음. 수능 전 마지막 사설 모의고사를 치른 날이었다.
나는 아빠와 병원으로 바로 갔다. 중환자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족들이 모두 와 있었다. 차갑게 식은 할아버지의 발에 내 수면양말이 신겨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뒤늦게 들어온 나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미 말은 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들도 나도 엉엉 울면서 할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모두가 알았다. 이 인사가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몇 시간 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오랜 시간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부터 낳은 후, 그리고 지금까지 1년 이상 일을 쉰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대체로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맡겨져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파란 트럭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가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나는 도로에 보이는 간판 글씨를 거침없이 읽으며 할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우리 할아버지가 엄마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매우 놀랐다. 엄마가 말해주기 전에는 전혀 눈치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는 나를 친손주로서,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 문상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족들 대부분이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고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가 다녔던, 장례가 치러진 병원은 우리 건물 바로 옆이어서 나와 어린 사촌들은 밤이면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옥상으로 올라가 꼴매를 만났다. 장례를 치르느라 바쁜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누군가를 옥상의 고양이들과 은심이를 돌봐야 했다. 나는 옥상 고양이들은 챙기고 나서 꼴매 앞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함께했다. 눈에 띄게 기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나를 보며 깜빡이는 눈과 야옹, 하는 작은 울음소리는 여전했다. 골골 소리도 냈다. 그러니까, 어쩌면 좀 더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꼴매는 할아버지의 출상날 고양이별로 떠났다.
떠났다고 '들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꼴매와 함께하지 못했다.
처음에 엄마는 꼴매를 안락사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줄로 알고 있었는데, 몇 년 전 다시 물어보니 또 그러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마 당시의 나에게 꼴매의 마지막 모습이나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은 그때 꼴매를 안락사시키러 병원에 갈 시간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발인이 끝나고 장지에 갔다가 우리 건물로 돌아와 이모, 삼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점에 꼴매는 이미 고양이별로 먼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친척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잠깐 낮잠을 자고 나서 올라간 옥상에 이미 꼴매는 없었다.
그날은 울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3일 내내 할아버지를 위해 울고 또 울었다. 장지에서 돌아오는 리무진 버스 안에서는 눈물이 거의 나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울고 난 뒤였다.
꼴매도 곧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 당시에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 흘리지 못했던 눈물은 모두 내 몸에 고여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3년 6개월 뒤, 할머니의 장례식 때 알았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그들과의 삶과 이별을 담은 저의 브런치북을 처음부터 읽어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눌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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