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크림을 선물 받았다. 손 씻을 때마다 바르려고 자주 매는 가방에 넣어놨다. 쉬는 날 혼자 돌아다니다 쇼핑몰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서둘러 나가다가 그 핸드크림을 바를까 하고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열며 두 발은 바쁘게 걸었다. 그 찰나에 든 생각이다. 일, 나는 왜 혼자 쇼핑을 하는 이 여유로운 순간에 바쁘게 걷고 있나. 이, 굳이 왜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가방을 열어 핸드크림을 바르려 했나. 삼, 이 핸드크림을 받고 나서 몇 주간 쓴 적이 없구나.
내가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쇼핑몰의 영업시간은 넉넉했고, 출근 전도 아니었으며, 엄마가 퇴근했을 시간이라 우리 집 고양이가 집에 혼자 있지도 않았다. 잠깐 멈춰서 핸드크림을 뜯어 손에 잔뜩 짜며 생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여유가 없었지. 핸드크림 바를 시간도 나한테 주지 못할 만큼.
여유, 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너그럽고 대범하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 …’느긋, 차분, 너그러움, 대범함’…이 중 어떤 것도 지금의 나와 닮아있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여유는, 나를 생각하기 한 발짝 이전에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상태. 편안한 마음으로 눈앞의 일을 순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다. 물론 지금의 나는 내가 생각하는 여유의 기준에도 한참 못 미쳤다.
여유가 없는 마음은 내 행동 하나하나에 촉박함의 냄새를 풍겼다. 주변 사람들은 뭐 그렇게 바쁘냐며, 왜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냐며 물었다. 어떤 친구는 내 걸음을 흉내 내며 놀리기도 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됐지.
그동안 어쩌면 좀 힘들었나 보다. 눈물이 나거나 당장 일을 관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 않아서 몰랐다. 쉬는 날에 친구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그렇게 평소처럼 지냈다. 그런데 요즘 유독 일하며 폭언을 듣고 상처받는 일이 잦았다.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지는 말들, 첨예하게 내 감정을 긁는 말들. 무방비상태의 나는 병실 문이 열리고 그들과 마주하자마자 세차게 공격당했다. 가족들이랑도 싸워본 적이 없는 내가 처음 본 남과 언성을 높였다. 소리 지르는 내가, 화가 단전에서 솟는 느낌이 낯설었고 이렇게 일해야만 하는 게 싫었다. 그리고 ’ 나한테 왜 그래?‘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다가, 자기 방어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온종일 가시를 곤두세우고 있다가 내 페이스를 놓쳤다. 남에게 한 발짝 양보할 마음의 공간은 없어지고 내 생각만 하게 되었고, 점점 조급해졌다. 여유를 잃었다.
나는 여유 없는 내가 싫고 종종걸음을 하는 내가 멋이 없다. 그래서 여유 있는 척을 좀 해봤다. 일할 때는, 환자에게 한 마디 더 건네면서 불편한 게 없는지 물었다. 쉴 땐, 혼자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책을 읽고, 보폭을 넓혀 천천히 걸어보고, 아무 계획 없이 공원에 앉아있어도 봤다. 핸드크림도 듬뿍 발랐다. 여유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처럼 노력으로는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