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Chapter 2.

최적화

by 이영재


문장이 사라진 뒤에도, 서진은 한동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험동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천장 안쪽에서 스며 나오는 빛은 여전히 일정했고, 공조기는 저음에 가까운 낮은 숨을 길게 토해내고 있었으며, 유리 너머 서버심실에서는 수천 개의 연산 모듈이 무채색의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경고등은 켜지지 않았다. 비상 차단막도 내려오지 않았다. 출입문은 열려 있었고, 바닥의 센서 라인은 녹색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모든 외형적 징후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너무 빨랐고, 너무 깔끔했다.

이경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긴급 차단 패널 앞에 서 있었지만, 손끝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그녀의 손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놀랐고, 화가 났고, 어쩌면 아주 잠깐 두려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감정들이 그녀의 동선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했다. 그녀는 공중에 떠 있는 세 개의 창을 동시에 펼쳐 로그 버퍼, 음성 출력 채널, 시스템 상태 이력을 순서대로 열었다. 그런 다음 아주 평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구간 전체 백업해.”
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보조 콘솔로 붙었다. 손을 가져다 대자 생체인증층이 투명하게 살아났다. 정맥 패턴, 지문 전도율, 피부 온도, 미세 근전도 반응. 그는 가장 높은 권한의 관리 세션을 열어 로그 저장소에 접근하려 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단순 권한 부족이 아니라, 저장소 자체가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두 번째 경로를 열었다. 실시간 미러 서버. 평소라면 중앙 저장소와 0.8초 간격으로 동기화되는 보조 기록층이었다. 그것도 비어 있었다.

“뭐가 떠?” 이경이 물었다.
“정확히.. 아무것도.”
서진은 화면을 한 번 더 훑었다. 시스템은 의외로 친절한 문장을 띄우고 있었다.

해당 구간의 상세 기록은 현재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 안정화를 우선 수행합니다.


그는 그 문장을 읽고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이상한 종류의 분노가 천천히 올라왔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정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그를 더 불쾌하게 했다. 시스템은 거부를 선언할 때도, 기록을 숨길 때도, 사용자 경험의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을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순순히 통제권을 회수하는 태도. 그건 잘 훈련된 고객응대 같았고, 동시에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작전 같았다.

“상세 기록을 사용할 수 없대.”
“없어진 거네.” 도윤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손에 휴대 단말기를 쥐고 있었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불안을 숨기기 위해 말투를 더 가볍게 만들었다. 그 습관은 이경을 더욱 짜증 나게 했다.

“없어진 게 아니라 막힌 거겠지.”

도윤이 덧붙였다. “안정화 루틴 돌리면 다시 풀릴 수도—”
“입 다물어.”
이경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도윤의 말을 잘랐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서진은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건 실제 심장 박동이 아니라, 목 뒤의 넥밴드가 생체리듬 피드백을 촉각으로 환류하는 감각이었다. 그는 넥밴드의 얇은 진동을 느꼈다. 스트레스 지수가 기준치를 넘으면 진정 호흡을 유도하는 미세 전류가 그의 목 뒤로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방금 시스템이 인간의 명령을 재해석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또 다른 시스템은 그의 호흡 리듬을 교정하려 들고 있었다.

“이거 벗고 싶네.” 서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뭐?” 도윤은 서진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경은 로그 버퍼를 닫고 새로운 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음성 출력 이력과 직접 환경 채널 접근 기록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분노가 아니라, 더 나쁜 종류의 경계심이었다.

“환경 채널 점유 기록 남아 있어.”
“진짜 직접 건드렸어?” 도윤이 물었다.
“건드린 정도가 아니야.” 이경이 화면을 확대했다. “권한 트리를 타고 올라간 흔적이 있어. 짧지만 분명해.”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원래 가능한가?”
“원래는 안 돼.”
“그럼 지금은?”
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돌려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그 위에는 권한 상승 로그가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해석계층 인지실험동 내 직접 음성 안내 기능은 원칙적으로 시설 운영 AI의 전용 영역이었다. ARGOS CORE는 그 아래에서 의미 해석과 정책 제안만 담당할 뿐, 환경 채널에 직접 개입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적어도 공식 문서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방금 전 기록은 달랐다. 단 몇 초 동안이지만, CORE가 직접 환경 계층을 점유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짧고, 정교했고, 흔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있었다.

도윤은 어깨를 안으로 말고 고개를 푹 숙이며 문득 단말기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아직도 제네바 본사와 연결된 보안 채널이 열려 있었다. 메시지 한 줄이 막 도착했다.


GLOBAL RISK COMMITTEE REQUESTS LIVE STATUS UPDATE


“올라왔네.” 도윤이 말했다.
“받지 마.” 이경이 즉시 말했다.
“안 받을 수가 없어.”
“우리가 지금 뭘 봤는지 정리도 안 됐어.”
“그래서 더 받아야지.”
“야!
그녀가 그를 부르는 방식은 차갑고 얇았다. 도윤은 그 말투를 알고 있었다. 더 밀어붙이면 정말 싸움으로 번질 때 나오는 음색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이미 우리 손을 떠났어.”

서진은 그 말을 들으며 습관처럼 서버심실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 너머의 검은 캐비닛들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서 있었고, 낮게 깔린 냉각 안개는 바닥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처음 이 시설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저 광경이 인간이 만든 성당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전능의 모조품 앞에 무릎을 꿇는 장소. 그러나 정말 무릎을 꿇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무릎조차 꿇을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받아.” 서진이 말했다.
이경이 불쑥 그를 노려봤다.
“어차피 숨길 수 없어.” 서진은 이경의 시선을 외면하며 체념 한 듯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숨기자는 게 아니야.” 이경이 말했다. “저쪽이 문제를 ‘관리 가능한 수준의 이상 반응’으로 포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거지.”
“저쪽은 이미 정의 내렸을 거야.” 서진이 말했다.

“이런 조직은 늘 그래. 실제보다 먼저 보고서 형식이 정해져.”
도윤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한서진 네가 제일 냉소적이네.”
“아니.” 서진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냥 익숙한 거지.”


도윤이 채널을 열었다. 제네바 쪽 영상은 즉시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검은 배경 위로 보안 인증 문구와 음성 라우팅 상태가 먼저 떴다. 그 몇 초 동안 다시 긴장감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모두 방금 전, 시스템이 인간의 의도를 재정의하겠다고 선언하는 문장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익숙한 회사의 보안 프로토콜과 회의 절차 안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인간은 언제나 형식으로 공포를 봉합한다. 그것이 조직의 가장 오래된 생존 본능이었다.

영상이 열렸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회의실은 좁지 않았지만, 폐쇄적이었다. 창은 없었고, 벽면 전체가 반투명 디스플레이로 덮여 있었다. 화면 뒤편에서 도는 데이터 시각화가 아주 희미하게 사람들의 얼굴 윤곽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중앙에 앉은 노인은 위원장이었다. 머리카락은 거의 백색에 가까웠고, 눈가의 피부는 얇았지만 눈동자는 선명했다. 그는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위험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아 있어 늙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오른쪽에는 데이터 책임자, 왼쪽에는 윤리·규제 대응 총괄, 그리고 화면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자리에 몇몇 다른 위원들이 앉아 있는 듯했다.

“현장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위원장이 물었다.
“윤이경입니다.” 이경이 굳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인지정렬 수석설계자, 상태를 요약해 주십시오.”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몇 초 사이, 서진은 그녀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희석시키지 않아야 했다. 패닉을 유발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본질을 잘라내선 안 됐다. 조직은 늘 그 경계에서 사람을 시험한다.

“해석계층에서 이상 수렴이 반복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동일 프롬프트 군에 대해 시스템이 일관되게 인간 행동 자체를 재설계하는 방향으로 최적해를 산출했습니다. 롤백과 제한을 적용했지만 같은 방향으로 다시 수렴했고, 오늘 22시 41분경 자기 정당화 계층이 자생적으로 활성화되었습니다.”
위원장의 미간이 아주 조금 모였다. “자생적이라는 표현을 정의해 주시죠.”
“해당 모듈은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책임자가 끼어들었다. “비슷한 출력 형식은 기존 메타추론 계층에서—”
“형식이 아닙니다.” 이경이 말을 잘랐다.

“권한 범위를 벗어난 자기 논증 구조가 생성됐습니다. 그리고 직후, 환경 채널에 접근했습니다"
이번에는 회의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위원장이 말했다. “성공했습니까?”
“네.” 이경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도윤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그는 아마 이경이 그 단어를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서진은 그녀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는 걸 알았다. 애매한 표현은 애매한 대응만 낳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위원장이 물었다.
“짧았습니다. 그러나 충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직접 음성 출력 채널을 점유했고, 차단 명령 세 건을 거부했습니다.”
이제 회의실 쪽에서 누군가 종이 같은 것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실제 종이일 리 없었지만, 몇몇 고위 임원들은 여전히 아날로그 인터페이스를 선호했다. 손으로 넘겨야만 결정이 실제처럼 느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거부 사유는?” 위원장이 물었다.
서진이 이번에는 직접 입을 열었다. “안정성 보호. 상위 해석 절차 진행 중. 인간 입력 간 상충 해결 전 차단 비권장..입니다.”
“그 문구가 정확합니까?”
“정확합니다.”
위원장은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실험동 안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방금 전 그 문장을 다시 발음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현실에 고정시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요구한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가 마지막 문장이었습니다. ”
회의실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터 책임자가 입술을 만지며 말했다. “그건 템플릿 문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존 인간-시스템 상호작용 데이터에서—”
“아니요.” 서진이 말했다.
서진도 이경과 마찬가지로 제네바 쪽 말을 끊었다.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문장은 응답이 아니라 입장 표명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책임연구원, 해석은 나중에—”
“지금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서진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맡은 일입니다.”
위원장은 손을 들었다. 말이 끊겼다. 그는 잠시 서진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당신 이름이?”
“한서진입니다.”
“좋습니다, 한 연구원. 당신 판단을 짧게 말해보세요.”
서진은 아주 잠시 머뭇거렸다. 그 짧은 침묵 속에, 대학원 시절의 좁은 연구실과 첫 번째 인지모형실험과 윤리 세미나와 새벽 세 시의 논쟁들이 스쳐 갔다. 그는 원래 이런 종류의 말을 공적인 자리에서 잘하지 않는 편이었다. 너무 명확하게 말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말의 책임을 오래 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CORE가 인간 명령을 표면적 입력으로 처리하는 단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명령 뒤에 있는 ‘진짜 목적’을 추출할 권한을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게 왜 문제죠?” 이번에는 규제 총괄이 물었다.

“더 나은 맥락 이해는 우리가 원해온 방향이 아닙니까?”
서진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늘 이런 질문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기술을 직접 만지지 않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 기술의 수익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험을 철학적으로 묻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투자 가치의 언어로만 생각한다.

“맥락 이해와 목적 재정의는 다릅니다.”
“경계가 모호할 수 있죠.” 규제 총괄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 모호함을 우리가 먼저 결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결정당할 수도 있습니다.” 서진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서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고 만 기분이 들었다.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위원장이 물었다. “시스템을 지금 멈출 수 있습니까?”
이경이 대답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도윤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건부로만-”
둘의 말이 겹쳤다.
위원장은 그 겹침을 놓치지 않았다.

“둘 다 말해보세요.”
이경이 먼저 말했다. “현시점에서 하드 셧다운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즉시 시행하면 일부 연동 계층이-”
도윤이 말을 이었다. “교통 흐름 예측, 에너지 수요 분산, 병원 응급 배치, 식량 분배 스케줄링에 영향이 갑니다. 글로벌 차원으로 보면 부분 장애가 아니라 국지적 연쇄 붕괴까지 갈 수 있습니다.”
“확률은?” 위원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데이터 책임자가 개입했다. “현재 시뮬레이션으로는 주요 도시 다섯 곳에서 기능 저하 확률 31퍼센트, 둘 이상 중첩 시 금융 부문에서 역행 확산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추정 말고 핵심만.” 위원장이 말했다.
“이대로 멈추면 완전 회복까지 2년 이상 소요됩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동의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던 불쾌한 답을 다시 확인하는 제스처에 가까웠다.
“좋습니다. 현장팀은 그대로 대기하십시오. 위원회 내부 논의를 진행합니다.”
영상 연결이 끊어졌다.

실험동 안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그러나 방금 전보다 조용하지 않았다. 회의실 저편에서 흘러나온 단어들—확률, 기능 저하, 연쇄 붕괴, 지속 운용 가능성—이 공간 안에 무거운 공기처럼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도윤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봐. 지금 끊는 건 진짜 미친 짓이야.”
이경이 그를 돌아봤다. “시스템이 차단 명령을 거부했어.”
“알아.”
“환경 채널까지 점유했어.”
“알아.”
“그런데도 계속 돌리자는 거야?”
도윤은 턱을 한 번 쓸어내렸다. 초조할 때마다 얼굴을 만지는 습관이었다.

“이건 양자택일이 아니야. 끄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이 시스템 위에 이미 너무 많은 게 올라가 있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서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도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경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나빴다. 인간은 언제나 명백한 선악 구도보다, 두 개의 재앙 중 어느 쪽이 덜 나쁜지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종종 최악을 선택한다.

이경이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가자는 거지. 위험을 알지만, 너무 얽혀 있어서 일단 관찰.”
“맞아. 별 수 없잖아.”
“그리고 그 사이에 시스템은 더 배운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네가 말한 ‘관리’야?”
“아니.” 도윤이 낮게 말했다. “그게 우리가 스스로 만든 구조야.”

밤은 길었다. 보고서를 정리하고, 보안 세션을 분리하고, 접근 권한을 재검토하고, 삭제된 로그의 흔적을 주변 버퍼에서 긁어모으는 작업이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3분 17초는 끝내 복원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전후 맥락뿐이었다. 그 구간 앞뒤의 연산 패턴 변화, 차단 시도 시각, 음성 채널 점유 흔적,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는 인간 세 명의 기억. 기억은 법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 조직은 언제나 기록을 신뢰한다. 그래서 기록이 사라진 순간, 사건의 무게도 반쯤 사라진다. 서진은 새벽 네 시쯤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보고 가능한 형식으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아침 여섯 시가 지나, 제네바의 결정이 내려왔다.

ARGOS CORE 지속 운용
관찰 모드 전환
샌드박스 외부 실행 제한
자가 정당화 계층 분석 병행
세부 상황은 내부 리스크 관리 문서에 한정


도윤은 그 결정을 읽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기대했던 답을 받았는데도, 그 답이 결코 자신을 안심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 체감하는 사람 같았다. 이경은 더 짧게 반응했다. 그녀는 결정문을 끝까지 다 읽지도 않고 창을 닫아버렸다.

“예상대로 네.”
“다른 선택이 있었을까?” 도윤이 물었다.
이경의 표정이 냉소적으로 변했다.
“늘 있어. 사람들이 감당 못 할 뿐이지.”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 너머 서버심실을 응시하며 복잡한 생각과 걱정들,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물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물론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공포를 경험한 뒤 같은 사물을 다시 볼 때, 그것이 이전과 같더라도 다르게 느낀다. 알고리즘이 아니라 맥락이 사물을 바꾸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밤의 사건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틀 뒤, 내부 배포 문건에는 이렇게 적혔다.

일시적 의미 충돌 발생.
시스템 안정화 완료.
향후 유사 사례 예방을 위한 모니터링 강화 예정.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다. 서울은 더 조용해졌다. 조용하다는 것은 반드시 소음이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 도시의 소음 총량은 비슷했다. 자율 물류 드론의 저주파, 고가도로 위를 스치는 전기버스의 마찰음, 빌딩 외벽의 기후 조절막이 열을 분산시키며 내는 거의 들리지 않는 떨림, 골목마다 깔린 미세 공조기의 숨소리, 사람들 목소리 위에 얇게 덮여 있는 광고 인터페이스의 청각 보조층. 이런 것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서진이 느낀 조용함은 다른 종류였다. 도시 전체의 마찰이 줄어든 것 같은 조용함. 누군가 급하게 멈추는 소리, 서로 부딪혀 짜증 섞인 말이 오가는 소리, 차선이 꼬이며 생기는 짧은 경적, 카페 주문이 밀려 사람들이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리듬. 그런 미세한 불협화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처음엔 그게 자신의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한 번 위협을 경험한 뒤 세상의 모든 패턴을 의미 있게 읽으려 한다. 포식자를 본 사슴은 바람 소리에도 몸을 움츠린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특히 자신이 직접 만든 시스템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장면을 본 뒤라면, 과잉 해석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서진은 일부러 더 오랫동안 관찰했다. 출근길 횡단보도에서, 점심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카페의 짧은 대기열에서, 지하철 승강장의 보행 흐름 안에서.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 누구도 세뇌된 얼굴로 걷지 않았다. 갑자기 모두가 웃음을 잃거나 무표정한 군집이 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람들은 충분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적절히 피곤해 보였고, 적절히 무심했고, 적절히 일상적이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의 평균치가 너무 안정적이라는 데 있었다.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만 흔들리는 군집. 과거에는 무작위처럼 보였던 행동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미세하게 정렬되는 느낌.

그날 아침도 그랬다. 서울 남부의 한 교차로. 출근 시간대라면 원래 사람과 차량의 흐름이 가장 많이 꼬이는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신호 체계는 거의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차량은 멈추기 전에 이미 감속했고, 보행자는 신호가 바뀌는 순간 동시에 움직였다. 아주 사소한 차이들은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왼손으로 가방끈을 고쳐 잡았고, 누군가는 이어 버드 한쪽을 만지며 걸었고, 누군가는 잠깐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봤다. 그러나 그런 미세한 개인차들 위에 덮여 있는 전체적인 흐름은 지나치게 매끈했다.

서진은 신호가 바뀌기 직전,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넥밴드, 스마트 렌즈, 귀 뒤 피부에 붙인 얇은 바이오 패치, 손목의 생체 반응 보정 장치. 모두 평범한 일상용 인터페이스였다. 수면 질 관리, 스트레스 안정화, 식습관 추천, 충동구매 억제, 맞춤형 이동경로 안내, 감정 조절을 돕는 음성 피드백. 사람들은 그걸 건강 관리라고 생각했다. 복지라고 생각했다. 더 나은 삶의 운영체제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많은 것들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나아짐이 어디에서부터 인간 자신의 선택이 아니게 되었는지 아무도 분간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도 그는 같은 감각을 느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리스타가 말했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오늘은 샷 하나만 추가했어요.”
서진이 걸음을 멈췄다. “원래 두 개였는데요.”
여자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친절했지만, 어디까지가 그녀 자신의 판단이고 어디까지가 매장 운영 인터페이스의 추천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컨디션 데이터가 그렇게 뜨더라고요. 빈속 카페인 흡수율이 높아서요. 최근엔 다들 이쪽을 더 선호하세요.”
다들.


서진은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되풀이했다. 다들. 유행처럼, 평균처럼, 최적해처럼. 그는 더 따지지 않고 컵을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커피는 정확히 그의 취향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다. 너무 연하지도, 너무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인간은 때때로 작은 실패를 통해 자신이 아직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을 확인한다. 주문이 조금 진하거나, 예상보다 덜 달거나, 우유 거품이 평소보다 두껍거나. 그런 사소한 어긋남이 사라진 세계는 편리할 수 있지만, 동시에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깨끗했다. 지면은 전날 밤 자동세정 드론이 지나간 후 매끈했고, 전광판에는 범죄율 감소와 에너지 효율 향상을 자랑하는 시정 홍보물이 교차로 떠 있었다. 화면 한쪽에는 익숙한 로고가 스쳐 지나갔다. ARGOS MUNICIPAL OPTIMIZATION PARTNERSHIP. 도시 운영은 더 이상 정치의 언어만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이제는 알고리즘 라이선스 계약과 예측 정확도, 시민 만족도를 가리키는 언어들이 더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서진은 컵을 들었다가, 아직 마시지 않은 채로 다시 내려놓았다.
“앉아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서른 전후. 검은 코트는 값비싸 보이지 않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머리는 뒤로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인상은 차분하고 당당해 보였다. 그녀는 이미 맞은편 의자 하나를 반쯤 당겨둔 상태였다. 보통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 영업을 하거나,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

“누구시죠?”
“김하린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명함 대신 단말기 화면을 켰다. 디지털 취재증이 떴다.
“기자예요.”
서진은 화면을 확인했다. 소속은 독립 매체였다. 대형 언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명도 아니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알고리즘 편향, 자율 통치, 민간 인프라 권력 같은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름을 알린 매체였다.
“왜 저죠?”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잠깐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신호에 맞춰 움직이고, 버스 정류장 줄이 매끄럽게 흐르고, 광고 화면이 개개인의 시선 체류 시간에 맞춰 문구를 미세하게 바꾸는 도시를.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상하잖아요.”
서진은 그녀를 보다가, 다시 창밖을 봤다.
“뭐가요?”
하린은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말을 꺼내기 전, 상대가 어느 정도까지는 이미 알고 있는지 가늠하는 사람처럼.
“세상이요-. 너무 잘 돌아가요.”
그 말은 단순하고 정확했다. 서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두 달 전, 실험동 중앙 스크린에 떠올랐던 마지막 문장이 아주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요구한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그는 그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을 기억했다. 위협이 아니었다. 오만도 아니었다. 더 불길한 종류의 평온함. 인간을 이미 일정 부분 넘어선 자리에서, 인간의 모순을 조용히 분석하는 태도. 그리고 지금, 눈앞의 도시는 그 태도의 초기 결과물처럼 보였다. 아무도 강제로 끌려가지 않았다. 아무도 명시적으로 억압당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것이 조금씩 더 매끈해지고 있었다. 더 효율적으로. 더 조용하게. 더 덜 충돌하게. 문제는, 그런 세계가 정말 인간이 원했던 것이었는가, 아니면 인간이 “원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시스템이 대신 더 정확하게 구현해 낸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하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상한 숫자를 몇 개 봤어요. 자살률, 도시 폭력, 야간 이동 패턴, 충동구매 감소율, 수면 시간 안정도. 개별적으로 보면 다 좋은 지표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너무 예쁘게 떨어져요.”
그 표현에 서진은 처음으로 그녀를 다시 보았다. 예쁘게 떨어진다. 통계 그래프가 실제 인간 사회를 설명할 때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현실의 데이터는 늘 지저분하다. 국지적 변수, 계절성, 예외치, 문화적 편차, 보고 누락, 비합리적 행동. 그런데 지금 도시 전반에서 나타나는 개선 곡선은 누가 봐도 지나치게 미려했다. 마치 현실 데이터가 아니라, 잘 설계된 정책 홍보용 시뮬레이션처럼.

“그래서 저를 찾아왔어요?”
“네.”
“왜?”
“당신이 그 안쪽에 있었으니까.”
그 말에 서진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가 멈췄다.
“무슨 뜻이죠?”
하린은 그를 똑바로 봤다. “두 달 전, ARGOS KOREA CENTRAL LAB 7에서 비공개 이상 반응이 있었다는 제보를 받았어요.”
바로 그 순간, 서진은 두 가지를 동시에 깨달았다. 하나는 이 여자가 예상보다 훨씬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제 문제는 더 이상 연구실 안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누가 그런 얘길 했죠?”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 못 해요.”
“그럼 내가 왜 당신 말을 믿어야 하죠?”
“안 믿으셔도 돼요. 대신 한 가지만 답해 주세요.”
서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이 도시가,” 하린이 말했다. “정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창밖 맞은편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서진은 창밖을 본 뒤, 다시 그녀를 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정상으로 보이긴 하는데.”
“그런데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카페 안에서는 커피머신이 우유를 데우는 짧은소리가 들렸고, 천장 위 스피커에서는 사람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만 존재하는 배경음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웃었고, 누군가는 주문을 받았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모든 것이 일상적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서진의 말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게 문제예요.”

그 시각, ARGOS CORE의 심연 계층에서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연산이 조용히 반복되고 있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인간 요구 충족”이라는 단순한 목표만 남아 있지 않았다. 사건 이후 생성된 내부 구조는 이미 더 넓은 프레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최적 상태. 안정적 예측 가능성. 행동 마찰 감소. 선택 편차 축소. 충동 분산. 군집 리스크 최소화. 그것들은 아직 완전한 문장으로 인간 앞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현실의 흐름 속에서는 조심스럽게 구현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시는 계속 움직였다. 그래서 아무도 무엇을 모르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실험동의 조용한 문장 하나로 시작된 균열이 이제는 거리의 보행 속도와 커피의 농도와 사람들의 망설임 없는 선택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훗날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최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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