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재 Jan 28. 2023

하이데거와 보낸 하룻밤






  그는 가쁜 숨을 고른 후, 다음에 이을 말을 골몰히 떠올렸다. 나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그의 눈과 귀로 들어간 세상이 오직 그를 통해 다시 세상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차가운 보슬비가 오래된 처마를 때리기 시작하자 그는 눈을 번뜩이며 두꺼운 입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니체의 말대로 비탈진 언덕에 도시를 세울 용기는 없없어요. 마음에 빈자리가 있어야 용기든 희망이든 차오를 테니까요. 마음은 고통의 기억들로 가득했죠. 그 기억들은 여전히 빨간색이에요. 태양이 저물 때 새빨갛게 물든 바다를 본 적 있나요? 거의 한 시간 동안 서서 그걸 바라봤어요. 눈이 침침해질 때쯤, 거대한 바다가 태양을 통째로 삼키고 있었죠. 적어도 내 눈에는 태양은 삼켜지고 있었다고! 다들 태양은 지구와 아주 먼 곳에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거 몰라요. 거대한 광(光)음을 내면서, 또 '치이익, 치이이이익', 태양은 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별수 없이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거든요. 그의 뜨거운 몸은 점점 차가워졌고 바다는 붉은색으로 끓어올랐어요. 그리고 끝내 눈물을 쏟았어요. 절벽 위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어둠만은 내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더군요. 눈앞이 캄캄해지고 오직 파도소리만 남을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어요. 그날은 어쩐지 달빛도 보이지 않았죠. 어둠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물며 나와 함께 바다를 향해 절규했어요. 태양을 다시 돌려달라고요."


'피의 바다' - 이영재 화백[2023.01.07, 캔버스에 유화]




 그는 기억에 잠겨 그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벽장에 비스듬히 세워 둔 상반신 거울에 그의 붉어진 눈시울이 스쳐 지나갔다. 벽난로에서 '따닥따닥'거리는 장작 소리가 시계 대신 시간의 흐름을 알렸다. 의자에 걸친 손등 위로 잠깐의 시간이 흘러내렸다. 그의 작은 머리에서 떠난 내 시선이 천장을 향했을 때 장작에서 튕겨 나온  개의 불꽃은 이 좁은 방 안을 어느새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태양은 다시 떠오르잖아요.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시간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때때로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만, 시간 속에는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의 무의미를, 모든 무의미한 것들의 의미를 끌어올리는 힘이 들어 있어요. 사람들은 이걸 희망이라 부르잖아요? 그러고 보니 희망은 항상 공기에 떠 있다니까요."


나의 섣부른 농담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그는 확신에 찬 눈으로 나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에 고여있는 주황빛을 응시했다.


"희망이라.. 절망을 잠시 잊게 해주는 좋은 녀석이죠. 맞아요. 내일의 태양은 다시 바다 위로 떠오를 거예요. 그런데 존재는 시간 위에 계속 쌓일지라도 내가 슬퍼하는 이유는.. 끝내 존재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절망에 있어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무수히 많은 언어로 존재들을 설명하기만 할 뿐, 정작 그들에게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해요.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거예요.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덧붙여가며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인생의 불안감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언어의 감옥을 사이에 두고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를 건너뛰고, 과연 진정한 존재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직접 바다로 뛰어 들어서 차가운 암석 덩어리로 변한 태양을 향해 열심히 헤엄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아직 355개의 태양이 남아있다는 위안 보다 어제 저물어간 태양을 몹시 그리워하며 와인에 흠뻑 취하는 게 나아요."


"아.. 그런 의미에서 와인 좀 드릴까요? 얼마 전에 사놓은 게 있긴 한데, 그럭저럭 마실만 하더라고요."


그는 밝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이야기를 시작한 지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지만 그토록 밝은 표정은 처음이었다. 나는 재빨리 부엌으로 걸어가 찬장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롯데마트에서 구입한 저가형의 국내산 와인이었다. 와인 잔 대신 머그컵으로, 코르크 대신 병뚜껑이었지만 구색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시원찮은 손님 대접에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만 빼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머그컵을 받아 든 그의 손 위로 붉은색 와인이 떨어졌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장작 향과 치열한 사유의 향연이 공중에서 와인과 만나 그의 잔 속에서 뭉개다.


"으음? 이건 정말 색다른 맛인데? 어디서 만든 거예요? 혀 끝이 아주 쌉싸름하네요."


"국내산이에요. 괜찮나요?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가끔 생각날 때 마시는 거예요. 비싼 건 아니고요."


"사실 비싼 것만 마셔본 나로서는 싸구려가 오히려 희귀해요. 효용이 증가하는 기분인데요? 내가 여기서 며칠 더 지낼 수만 있다면 내일 아침에 당장 이 놈부터 사 올 거예요. 크"


"입에 맞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와인도 드렸으니 이제 제 차례인 것 같네요. 다시 태양 얘기를 해볼게요. 한편으로는, 태양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향해 열어 밝히는 존재자라고 해도 결국 세계에 한정 지어진 인간에게는 인식론이야말로 태양을 느낄 최선이 아닐까요? 체계적이고 공통적인 인식을 위해 존재자를 좌표계로 옮겨놓은 데카르트 역시 추상화의 한계에 굴복했지만, 저 같은 소시민이 보았을 때도 인간에게는 방법론적인 한계가 존재해요. 저는 그 공백을 과학이, 더 많은 공백은 종교가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태양을 쫓아 소나를 켜두고, 절벽 위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캠핑을 할 수도 있잖아요? 일상의 틀을 깨고 실존하기 위해 죽음을 마주하는 것보다 한나 아렌트처럼 탄생을 축복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요. 실존이라는 것은 본래의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인데, 현전(現前)을 탐구하기 위해 인식론의 한계부터 들추어내야 한다는 논지는 얼핏 실존의 조건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 지.."


나의 반론을 듣는 내내 그는 손목을 흔들며 잔 속에서 넘실대는 와인을 바라봤다. 와인은 병에서 컵이라는 세계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진동했다. 조금만 더 세게 흔들면 당장이라도 와인은 다른 세계를 침범할 것 같았다. 그는 다행히 손동작을 멈추고 조금 남아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컵을 관찰했고 와인에 키스하기 위해 컵의 적당한 각도를 염려했을 것이다. 적당한 악력과 삼두근의 힘, 또한 만유인력과 그 힘을 자연스럽게 이용할 줄 아는 시냅스의 엉킴은 컵의 쓰임을 보증했고 와인은 곧 그가 되었다.


"좋은 지적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 오해가 있어요. 존재자를 탐구하기 위해 석양을 바라보며 인식론을 풍자한 것이 아니라, 인식론에 매몰된다면 실존할 수 없다는 예시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존재라것이 그 세계와 관찰을 전제한다고 생각하나요? 존재를 발산하는 존재자는 엄연히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요. 설령 어떠한 인식도 허용하지 않을, 그런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존에는 작은 흠집조차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일상의 끝은 엄연히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을 빼놓고는 실존의 합당한 조건을 설명할 수 없어요. 탄생은 존재자를 밝히는데 아주 유용한 과거의 정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존의 방향을 정하거나 애매한 일상을 벗어나야 하는 당위성까지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에요. 존재자가 자신의 맨 처음 존재를 정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걸 탄생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불렀겠죠. 모든 존재의 시작은 탄생에서 비롯되듯 실존의 시작은 죽음에서 시작해요. 태양의 영원한 죽음을 볼 줄 아는 자만이 절규할 수 있고 실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죽음을 잊은 존재자는 해탈한 것이 아니라 실존을 거부하는 것이고, 마침내 자아를 현실이 아닌 관념의 세계로 힘껏 밀어내기에 이르죠. 아참, 그리고 데카르트의 좌표계는 현시성을 대변하는 수학적 구조일 뿐이에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존재는 수학이 아니라 현실에 있어요. 수학 역시 언어와 마찬가지로 진리로 만든 감옥이에요. 어두운 방 안에서 무작위로 깜빡거릴 무수한 등잔불로는 쉽사리 전체를 보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아 그리고 와인 좀 더 줄래요? 취하고 싶어요. 이왕 안주도 같이 주면 고마워요."


그러나 정작 취한 사람은 나였다. 그의 능청스러운 달변에 머리가 해롱거렸다. 옅은 수염이 자라나기 시작한 이후, 이토록 진지한 대화를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어쩌면 진지한 대화라기보다 특별한 생각을 특이하게 가지고 노는 놀이의 일종에 더 가까웠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다시 찬장 앞에 섰다.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느라 맥이 빠져버린 몸통을 붙들고 간신히 버티고 섰다. 멍한 기분을 놓치기 싫었다. 잠깐 사이, 한 평 남짓의 부엌은 금세 비릿한 바닷물로 가득  올랐다. 전 우주의 바다를 합친 것보다 더 깊은 존재의 바다가 발 끝에서 내 이마로 솟구치고 있었다. 차갑고 시큼한 물의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나는 곧이어 심연 향해 힘껏 헤엄쳤다. 때때로 낚시 바늘에 걸려 온몸이 찢어졌다가 빠르게 살이 붙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존재자가 발산하는 존재의 허울만으로는 이 지독한 일상의 지루함과 불안감을 지울 리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존재의 출현' - 이영재 화백[2023.01.22, 캔버스에 유화]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내일 아침 일찍 나가셔야 하잖아요. 이건 새우깡이라는 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예요. 와인이랑 드셔 보세요."


그는 새우깡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후 새우깡을 대충 입에 넣었다. 와그작거리는 그의 입술은 여전히 머그컵 언저리에 걸쳐 있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이건.. 새우랑 모양과 맛이 비슷하네요. 플라톤이 이걸 먹어 봤다면 새우깡도 새우의 그림자라고 했을까요? 인간은 자연의 훌륭한 모사꾼이에요. 이 지구에서 인간만큼 존재에 물음을 던지고 그 특징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존재자는 없어요."


"맞아요. 인간은 누구나 자연 앞에서 현존재 노릇을 하죠. 한편으로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게 정말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느껴요. 우리가 대체 어떤 위상을 지닌 존재이기에 인간 외의 것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단지 더 지능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타자의 존재를 인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아닐지."


"그렇다고 뭐 스스로 속한 세계에 대해 더 겸손해할 필요는 없죠. 나 홀로 위대하다고 생각하든 모자라다고 생각하든 존재자의 본질은 존재로 규정될 수 없으니까요. 들꽃 보다 더 숙인다고 해도 그런 행위가 들꽃의 위상을 높이는 것도, 숙이는 행위가 숙이는 자의 존재를 더 고결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에요. 실존하려면 착각과 현실, 작위와 자연스러움을 구분해야 해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인 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만 하면 쉽게 풀리는 문제예요. 생각, 물질, 돈, 옷, 쾌락 이런 것들을 모두 모아서 의심해 보는 거예요. 진짜라고 생각했던 삶의 분위기를 전혀 다른 무언가로 색다르게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환기하는 훈련만 여러 번 반복하면 굳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지 않더라도 시공간을 전혀 색다르게 느껴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늘 새로운 볼거리와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경험을 원하지만 현존재가 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다르다는 걸 감할 거예요."


"환기해 보고 싶어요. 어쩔 때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정말 낯선 것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심지어 나와 내 삶에 대해서도요. 소유와 인격의 환상에서 벗어나 정말 나체로 서서 본질을 안아보고 싶어요. 생각의 수레바퀴를 부숴버리고 관찰과 분석의 세계, 학습과 습관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우주의 의지대로 이끌려 보는 거예요. 팽팽한 가치의 서열도, 선택과 규범의 중력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공간에서 오직 생명만 간직한 채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좋아요. 근데 그런 태도는 조금 과격하고 때로는 현존재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요. 현존재의 기본구조는 그가 가지는 독특한 '시간성'이에요. 자신을 미리 앞서 있고, 이미 세계 속에 있으며, 다른 존재자 곁에 머물러 있는 상태죠. 그래서 현존재에게는 그 어떤 가능성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요. 불가능성과 죽음, 그리고 아무것도 없고 무엇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가 전부 다 그 안에 중첩되어 있어요."


그의 형이상학을 열심히 쫓느라 뇌에 젖산이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와인으로 상기된 그의 얼굴은 불빛에 그을려 더 빨갛게 변했고 마치 횡단보도의 빨간 불처럼 보였다. 무단으로 철학을 횡단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에 지쳐 쓰러져 갔을까.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몇 초가 지난 후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존재의 개념이 잘 이해가 안 돼요. 정확히 말하면, 현존재는 생물적인 죽음을 걱정하는 존재에 불과할 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특징 외에 무엇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인 지는 잘 모르겠어요."


"존재의 개념부터 간결하게 설명해 줄게요. 음.. '있다'라는 것은 세계에 존재가 출현한 상태를 말해요. 나는 이걸 '주어진 상태'라고 표현해요. 보이거나 만지거나 맛보거나 하는 인식의 대상은 존재자가 그의 세계에서 발산하는 어떤 존재가 되겠죠. 맞나요?"


"네 맞아요."


"그리고 존재는 시시각각 변화해요. 사람들은 이걸 보기 좋게 과거, 지금, 미래로 구분하여 파악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면 죽음 같은 소멸을 전제하고, 또한 더 쉽게 생각하기 위해 존재와 존재자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죠. 여기 우리 앞에 장작이 활활 타고 있어요. 활활 타는 것은 세계 속에 출현한 장작의 존재 중 일부예요. 언젠가 다 타서 장작의 모든 부분이 재로 변한다면, 장작의 존재는 흩날리는 재가 될 것이고, 그 존재자는 없어질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이 아니라 과거에 그것이 장작이었다고 말할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하지 않나요? 장작은 존재에서 비존재로 이동하는 가운데, 그러니까 '있다'에서 '없다'로 변했는데, '무언가가 처음부터 없지 않고 왜 하필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거예요. 존재는 왜 하필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인간의 세계로 가져오면, 인간은 그 순간 죽음과 무(無)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불가능성에 직면하게 요. 어떤 것이 가능하다는 상태는 결국 존재가 다른 존재자를 향해 발산 중이라는 것인데, 마치 깜빡이는 조명처럼 꺼질 위기에 처해 어둠을 예견해야만 하는 불안감은 소멸 앞에서 앞으로의 자신의 모든 존재에 대해 불가능한 것과 다름없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따라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부터 미래로 나뉘는 형식적인 구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입장에서 죽음과 무(無)로 귀결되는 그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다른 존재자에게 그의 존재가 아닌 존재자 그 자체에게 다가가서 머물 수 있는 실존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이제 조금 이해가 되나요?"


"네 설명 감사해요. 그러니까 '없음'을 향해 떨어지는 '있음'의 상태는 인식할 때마다 관찰되는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에 더 가깝게 존재하고, 이건 오히려 시간의 구분이 아니라 시간을 전제로 하는 현존재의 특성이라는 말이죠?"


"그런.. 것 같네요."


"그러면 현존재로 실존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애매하고 조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거나 익숙한 것들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환기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 시시각각 변해가는 존재의 불가능성을 자신의 근본적인 시간성으로 받아들인 상태..라는 거네요? 맞아요?"


"정확해요.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딱히 대체할 단어가 없어서 시간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풀어서 얘기하면 여기서 시간성의 의미는. 현상학에서 다루는 '전이의 종합'을 의미해요. 시간은 과거지향과 미래지향이라는 지향성의 종합으로 성립하는데, 그 종합은 계속해서 변화하죠. 즉, 능동적이고 지성적인 지향성의 작용을 넘어서 그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수동적이고 감성적인 지향성의 종합이 있음을 예측해 볼 수 있어요. 현존재의 시간성이란 바로 이런 지향성을 뜻하는 거예요."


ㆍㆍㆍ


그와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나의 시간성은 감성적으로 변해 시간의 속도를 기분과 분위기의 전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간에 앞서 외부의 시간을 감성적으로 의존하는 익숙한 지향성이었다. 시간은 정말 아쉽게도 벌써 아침 6시 50분을 가리켰다. 곧 그가 떠날 시간이었다. 그가 떠나면 나는 더 이상 그의 존재를 내 범위에서 인식할 수 없을 테지만, 그는 여전히 현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에 출현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없어지면 모두 타서 재로 변해버린 장작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내겐 장작과 비슷한 존재를 발산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불가능성은 곧 그의 불가능성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와 밤새도록 아주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실존에 대한 내 갈망은 입술을 더 메마르게 할 뿐이었다.


"태양이 뜨네요. 이제 가야겠어요."


"안 피곤하세요? 여기 따뜻한 커피 드세요. 밤새 와인이랑 과자만 드셔서 어쩌나요."


"괜찮아요. 내 뱃살 좀 보라고요. 두 달은 굶어도 끄떡없을 몸이잖아요!"


"네.. 다음에는 제가 꼭 마중 나갈게요. 조심히 가세요."


밤새 나누었던 대화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작별 인사는 비교적 단순했다. 태양이 뜨고 있었다. 어제 보았던 그 태양은 아니었다. 우주를 가로질러 거대한 광체를 내뿜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뒤에 숨어 있었다. 우리는 창가에 고개를 내민 태양을 향해 벌떡 일어섰다. 그는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다른 한 손은 뒷짐을 고, 나는 두 팔을 가볍게 늘어뜨리고 창가 앞에 섰다. 태양 빛이 점점 밝아졌다. 삭막한 갈색의 산맥들과 산 너머의 희미한 바닷물이 연주홍색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태양을 바라봤다. 우리는 태양과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세계 속에 함께 있음을 느꼈다. 존재하지 않음에서 존재로, 다시 존재하지 않음을 거쳐 하나의 세계로 통합될 수동적인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72년 1월 28일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온라인 작품전 : 이영재 화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