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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9. 2024

깔끔쟁이 부부의 마지막 제주 한달살이

여행을 하는 건지 청소를 다니는 건지

 5월 1일, 제주에서의 마지막 달을 보낼 북쪽, 제주시로 이사 왔다.


 5월에는 지인의 방문이 여러 건 예정되어 있어 큰 집이 필요했다. 두 달 전, 숙소 앱에서 집을 찾다가 우리 부부가 반했던 숙소가 있었다. 바다뷰, 3층 집+옥상 자쿠지, 방 2개, 화장실 2개가 딸린, 지인이 놀러 오더라도 함께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한때 도움 받았던 고마운 사람들에게 이번엔 내가 숙소를 제공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예산을 훌쩍 넘어가는 가격 때문에 선택을 망설이자, 남편은 “가성비 그만 따져. 우리도 좋은 데에서 좀 살아보자.”하며 과감하게 결제했다. 막상 예약하고 나니 집에 대한 기대는 남편보다 내가 더 컸나 보다. 5월이 다가오면서 다음 달 집에 대한 기대로 신났던걸 보면.


 숙소 도착과 동시에 ‘사진빨’이라는 말을 사람에게만 쓰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집이 예쁘긴 하다. 그런데 예쁘기만 하다.


 며칠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겠지만 한 달씩 살기에는 실용성이 떨어진다. 화장실이 2개이긴 하지만 한 군데는 천정이 낮고 좁아 사용하기 매우 불편하다. 이불과 베개에서는 냄새가 났고, 화장실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으며, 구석진 곳들의 청소 포함 해풍에 부식된 집의 상태가 아쉬웠다.


  ‘하아, 여기는 딱 인*타 사진용이구나.’ sns 사진 업데이트가 중요한 여행자에게 이곳이 로망 실현 숙소가 될 수 있다. 다만 나는 “예쁘면 다 용서돼.”라고 부르짖던 시절을 이미 지나왔고 sns 사진 공유에 그다지 흥미가 없기에, 숙소 첫 대면 시 떠오른 표현은 ‘낚였다’다.     


 첫날밤, 침구 냄새 때문에 이불을 사용 못 하고 결국 남편은 옷을 덮고 잤다. 나는 목도리 숄 안에 몸을 말아 넣고 웅크린 채 떨면서 선잠을 잤다. 큰마음먹고 결정한 숙소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곳이 한 달은 우리 집이니 우리 스타일로 바꾸는 수밖에.     

다이*를 들락거리며 물품을 사 와 예쁘기만 했던 집에 실용성을 더했고, 구석구석 대청소를 시작했다.

 

 첫날, 청소기와 청소포로 1층에서 4층까지 밀고 닦았다. 방에서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닦는데 회색으로 묻어 나오는 먼지에 깜짝 놀랐다. 집이 지어진 후로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어 보이는 화장실 환풍구와 창틀을 여러 차례 닦아 본연의 흰색으로 돌려놓았다. 기름때로 끈적거리는 싱크대 상판은 물티슈로 아무리 문질러도 우드 상판의 기름은 제거되지 않고 손목만 욱신거렸다.


환풍기 before&after

 

둘째 날은 빨래의 날이었다. 우선 세탁조 클리너로 세탁기부터 청소한 후, 이불과 패드, 베개 커버를 삶아 빨았다. 이불과 베개 솜은 햇빛에 종일 말려 소독하고, 매트리스는 페브리즈를 뿌려 냄새를 잡았다.


오전 내내 세탁기를 돌려, 베란다, 건조대, 식탁 의자까지 동원하여 빨래를 널었다. 더 이상 빨래를 말릴 곳이 없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 부부쉴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기도 했고, 다행히 날씨가 도와주어서 둘째 날부터는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었다!


햇살소독


셋째 날은 설거지 날로 정했다. 모든 식기와 냄비 수저를 다 꺼내서 세제로 닦고, 끓는 물로 열탕소독 후 햇빛에 말렸다.


집이 깨끗해진 만큼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3일째 날, 저녁 식사 도중 남편의 얼굴을 보는데 며칠 새 볼이 핼쑥해져 있었다. 3층 집 청소하느라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는 건지 돈 내고 출장 청소를 다니는 건지 헷갈렸다.


하긴 이곳뿐 아니라 지금까지 지냈던 두 곳에서도 쓸고 닦고 수선하고 숙소의 낡은 물품들을 내 돈 들여 새것으로 바꾸어 놓고 나왔다. 세 곳의 숙소 모두 우리가 살기 전보다 한 달을 지내다 나왔을 때가 더 깨끗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 부부의 깔끔함은 각자 모계를 통해 내려온 성향 탓이 크지만 나의 질병도 영향을 끼쳤다. 9년 전, 갑자기 찾아온 급성백혈병으로 나는 몇 달간 이어진 강한 항암치료와 동생의 피로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은 적이 있다. 치료 후 면역력이 떨어져 감염에 매우 취약해지는데, 이때 병원에서 받았던 위생 교육을 철저히 따르다 보니 우리는 청결에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는 그게 맞았다. 위생 수칙을 어겨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인데 누군들 날이 서지 않겠는가. 게다가 종종 들려오는 퇴원 후 감염으로 재입원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동병 환자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긴장케 했.


 시간이 흐르며 몸은 회복했지만 마음에는 건강염려증과 청소 강박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만하면 됐다고, 이 또한 내려놓으라고, 좀 더 편해지라는 마음의 외침이 들린다. 그때는 맞았던 행동이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이제 정신적으로도 급성백혈병이라는 구덩이에서 나오기 위해 이렇게 여행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부부가 둘 다 깔끔쟁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2년간의 여행이 끝난 후엔 청결 면에서 조금은 무던해지기를 바란다.


노을이 지는 시간 = 집 옥상으로 뛰어올라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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