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모여 202! 19화
얼마 전에 사내 메일로 연차 사용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의 메일이 날아왔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람 인생인데 무슨 연차 사용 계획서를 작성하라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는 연차는 다 소진하지 못해도 돈을 주거나, 다음 해로 넘어가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말소되기 전에 사용하라고 재촉하는 거였다.
내 기억에 연차를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1년 차 사원이기에 연차를 좀 아껴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계획서를 쓰면서 보니 내 연차는 무려 15개나 됐다. 12개라고 알고 있어서 8일 정도 남았나 싶었던 연차가 12일이나 남아 있으니 그저 땡큐 땡큐였다.
무조건 계획서대로 연차를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니 마음 편히 계획서를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그 뒤로 열심히 연차를 쓰고 있다.
연차는 군대에서 휴가를 나가는 것처럼 아주아주 행복한 건데 난 매번 연차를 쓰면 기분이 좋기는커녕 하루 종일 마음 한편이 찝찝하고 불편하다. 이런 기분은 중학생 때 학원 땡땡이쳤을 때, 고등학생 때 학교 땡땡이치고 피시방에 갔을 때 느꼈던 기분이다.
취업을 하기 전에는 모든 시간은 내 자유였다. 주말보다 평일에 놀러 가면 어딜 가든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어 참 좋았다. 그런데 연차를 쓰고 평일에 놀러 가면 그런 기분이 잘 들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혼자 축구를 보겠다며 부산에 내려왔는데 하루 종일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기분 좋게 축구를 보러 왔음에도 마냥 기쁘지 않다.
이 기분은 꼭 연차에만 국한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요즘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면서 회사에서 주 2일 재택근무를 하라고 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출퇴근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기만 했는데 막상 이번 주에 재택근무를 하니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회사 컴퓨터에는 그동안 내가 해 온 업무 파일들이 날짜별, 항목별로 정리가 되어 있었고 두 개의 모니터로 빠르게 일 처리가 가능했다. 그런데 재택근무 시에는 내 노트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불편한 점이 많다. 그래서인지 일처리도 늦어지고 실수도 하게 됐다.
사람은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던데 그런 것 때문일까? 아니면 내 노예근성이 발휘된 걸까?
군생활 중에도 설렁설렁할 수 있는 것들은 설렁설렁했다. 근데 신기하게 회사를 다니고부터는 그게 잘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100% 완벽하게 회사 일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와 잘못을 병행한다. 내가 쉬어도 누군가는 내 일을 해야 하기에 최대한 일을 하고 갔음에도 다른 분들에게 내 일을 맡기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도 않다.
결국 난 놀러 와서도 새벽에도, 낮에도 시간이 날 때면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확인하곤 했다.
쉬고 싶어서, 좋아하는 축구가 보고 싶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전을 해서 왔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고 괜스레 센치해진다.
직장인은 모두 이런 걸까? 연차를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한 걸까? 차라리 급한 일은 처리하고 일찍 퇴근하는 반차가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더 잘하고 싶어서, 욕심이 나서 그런 걸까? 일 할 시간에 놀고 있어서? 합법적으로 쉬는 날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재밌다. 나름대로 이 기분을 즐겨봐야겠다.
연차란 무엇이길래 내 마음은 이리도 불편한 걸까? 묘하다. 아주 묘해.
어차피 내일이면 출근을 할 테고, 또 일을 할 거다. 이젠 내 연차를 즐기러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