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마발 Mar 30. 2023

때아닌 혹한기 훈련

그깟 공놀이:직장인은 축구를 얼마나 볼 수 있을까? 2화

이번 시즌 나의 첫 원정, 지난 시즌 리그 2위와 FA컵 우승을 차지한 전북 현대 원정을 떠나기 위해 토요일 오전 일찍 부산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부산에 갈 생각은 없었다. 일요일 경기이니 전주나 근처에 놀러 갔다가 경기를 보러 가거나 할 생각이었다. 근데 부산여행을 가는 친구에게 초대를 받게 되었고, 지난 내 생일에 함께 축하도 해줬는데 안 갈 수 없어서 서울->부산->전주 1박 2일 여행 계획을 짰다. 회사 사람들도 놀랐고, 부산에서 같이 놀자던 친구도 축구를 진짜 보러 가냐며 놀랐던 원정길이었다.


대충 요런 루트였다.


주말에 지방을 내려가야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서울 탈출이다. 특히나 나는 서울 끄트머리에 살고 있어서 남쪽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 아래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좀 일찍 나가본다고 8-9시쯤 출발해 본 적도 있었는데 이 시간에도 어김없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는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그럼 경기도 부근 고속도로에서도 한창 길이 막히기에 점심은 휴게소에서 먹기 일쑤였다.

하필이면 <더 글로리 파트 2>가 전 날인 금요일 오후에 공개되어 새벽까지 정주행 하시느라 잠을 거의 못 잔 여자친구를 태우고 부지런히 부산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배고프다던 여자친구는 핫도그 하나 먹고는 금세 잠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고독한 싸움이 시작된다. 평일 내내 출근하느라 쌓인 피로는 고작 6시간 취침으로는 해결되지 않았고, 어마무시한 졸음이 나를 덮쳐왔다. 운전을 좋아해서 장거리 운전도 자주 하지만 참 이놈의 졸음은 내가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

힘겨운 졸음과의 사투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운전하는 내내 뜨거운 햇살 때문에 에어컨을 틀고 왔는데 부산 역시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로 꽤나 더운 날씨였다. 곳곳에 조금씩 핀 꽃들을 보니 이제 봄이 오는구나 싶었다.


한낮의 광안리는 생각보다 더웠다.


뭐 특별히 관광지를 가거나 하기 위함은 아니고 그저 맛있는 걸 먹기 위해 간 여행인지라 말 그대로 먹고, 자고, 먹고, 잤더니 일요일 오전이 되었다. 부산의 시그니처 음식인 돼지국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내비게이션에 전주월드컵경기장을 입력했다.


딱히 관광을 하기 위함은 아니지만 수변공원은 갔다.
딱히 관광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광안리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딱히 관광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광안리 드론쇼는 신기했다.


부산에서 전주는 처음 가보는 일정이라 모든 길이 처음 달려보는 길이었다. 전라도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꽤나 높은 지대에 도로가 깔려 있어 산봉우리가 그다지 높게 보이지 않으니 마치 강원도를 갈 때 보는 풍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름을 넣어야 하고, 운전자가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커피가 필요하다. 처음 보이는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도 다녀오고, 커피도 한 잔 샀더니 굵은 빗줄기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소식은 예보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우산을 차에 챙겼는데 휴게소에서는 비가 별로 오지도 않고, 차까지 거리도 멀지 않아서 꺼내지 않고 내렸더니 강한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타에 탈 수 있었다. 옷도 머리도 젖어버린 서로의 모습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우리는 깔깔대며 다시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날이 우중충해서 그런지 경기장도 참 정 없게 찍혔다.


어제의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비가 내리면서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대비를 한다고 비가 오면 좀 추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두툼한 후리스를 챙기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 둘의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경기장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나니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웠다. 우리는 모두 얇은 옷들로 코디를 했는데 이 옷으로는 차가운 바람을 하나도 막아주지 못했다. 나야 이런 경험이 없는 건 아니라서 어떻게든 참아보겠지만 날 위해서 서울에서 부산을 거쳐 전주까지 온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친구에게는 더욱 힘든 시간이 될 터라 미안하기도 하고 눈치도 보였다.

경기 시작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경기장도 좀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벌써부터 차에서 나가 돌아다니면 경기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차에서 엉따를 틀고 힘을 비축하다 경기 시작이 다가올 때서야 차에서 내렸다.

진짜 너무 추웠다. 전주까지 왔지만 축구가 보기 싫을 정도로 너무 추웠다.

매서운 바람을 뚫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보통 경기장에 들어가면 자리를 먼저 찾아가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데 이 날은 일단 매점으로 달려갔다. 원정석에는 매점이 따로 없고, 홈팬들과 같은 매점을 이용하도록 안내받았다. 이 날은 날씨 때문인지 관중도 적었고, 광주도 팬이 많은 팀이 아니라 괜찮겠지만 서포터 규모가 더 큰 팀이 오면 홈팬들과 같은 매점을 이용하면 무슨 충돌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큰 규모의 팀이 오면 원정석 매점을 여는지는 전 모릅니다.)


매점 가는 길에 본 전주월드컵경기장.


핫바와 따뜻한 커피를 샀다. 이 커피가 잠시나마 추위를 잊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택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문득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했을 때가 생각났다. 침낭 속에 10개가 넘는 손난로를 까 넣고 한참을 걷고 걸었던 피로를 이용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비군도 많이 추울 때는 안 한다던데…


그래도 부산을 거쳐 전주까지 왔으니 축구를 보지 않고 건너뛸 수는 없다. 날은 춥지만 예상했던 비가 오지 않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경기에 집중했다.

그동안 전북의 경기력이 좋지 않다고 해도 전북은 전북이었다. K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로 가득한 선발 멤버. 그들의 경력이나 몸값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광주의 선발 멤버. 경기력이 좋지 않네 어쩌고 해도 전북은 강했다. 특히 문선민의 플레이는 전반전에도 눈에 띄었다. 여자친구는 저 선수는 뭐 저렇게 빠르냐며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우린 전반전부터 날아다니던 문선민에게 내리 두 골을 먹히고 패배했다.

광주는 다시 한번 경기력도르(경기력이 좋은데 결과는 패배인 팀에게 주는 짝퉁 발롱도르)를 얻었다. 에이스 엄지성이 없어서인지 전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흐름으로 이어가던 공격 전개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뭔가 창의적인, 센스 넘치는 패스를 넣어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가 2:0이 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추위를 견디지 못한 여자친구는 먼저 차로 떠났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고 선수들이 인사하러 오는 모습까지는 보곤 했는데 나도 너무 추워서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냥 빠르게 지인들에게 먼저 가보겠다는 인사만 남기고 황급히 경기장을 떠났다.

사실 전북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김상식 감독 부임 후로 리그 우승도 하고, FA컵 우승도 한 전북이긴 하지만 특히 이번 시즌은 더욱 경기력이 별로였기에 우리에게 조금 더 운이 트이면 전북을 한 번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전북은 쉽지 않았다.


흐리지만 월드컵스타 조규성이다. 경기는 졌지만 조규성은 봤다.


이 날은 관중도 1만 명이 채 오지 않았다. 날씨, 상대가 비인기팀 광주, 좋지 않은 경기력으로 인한 팬들의 이탈까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한 결과겠지만 K리그의 스타들이 즐비한 전북이 다시 구름관중을 이끌고 다니는 그런 팀으로 변모하면 좋겠다. 그리고 3월의 축구장을 다시는 무시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1라운드 수원삼성 VS 광주FC : 결장

2라운드 광주FC VS FC서울 : 선발

3라운드 전북현대 VS 광주FC : 선발







매거진의 이전글 생일 선물이 받고 싶었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