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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샘 Sep 29. 2017

나만의 열한 계단

첫 번째, 유년과 자아; 데미안


'심지어 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 한 곳은 금지된 세계 안이었다'



데미안의 저 구절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년의 나에게는 금지된 것이 너무 많았다. 누군가의 흉을 보면 안 되었고, 혼자 늦게 돌아다니면 안 되었고, 이성친구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 되었다. 누구에게나 모범적이고 착한 아이로 불리지만 정작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은 죄다 금지된 것들이었다.

데미안은 이렇게 이어진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그리고 밝음 속으로의 귀환은- 그것이 제아무리 필연적이고 제아무리 선하더라도- 덜 아름다운 것, 보다 지루한 것, 보다 황량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의 내 목표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는 것, 그렇게 밝고 맑게, 그렇게 뛰어나고 단정하게 되는 것임을 나도 때로는 알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멀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학교에서 배겨내야 하고 대학 공부를 해야 하고 온갖 시험들을 치러야 했다."

지루하고 먼길. 나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금지된 것들의 가장 큰 매력은 낯설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또 다른 이름은 '자유'라고 불렸다.

가출을 하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며,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다.
이성친구를 만나면 감정과 사랑에 대한 자유를 얻는다.
누군가를 욕하면 비밀에 대한 공유와 은밀한 소속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금지된 것이었고, '나쁜 것'이었다. 왜 하지 말라는 걸까? 왜 나쁜 것일까? 내 유년은 꿈틀거리며 물음에 대한 답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성장소설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한 소년이 '인간'으로써 자아 정체성을 갖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소설의 제목은 데미안인데, 막상 책을 펼치면 나오는 첫 주인공은 '싱클레어'라는 소년이다.
부잣집 가정에서 자란 그는 '부모, 부유함, 안온함'이라는 유년의 품에서 돌연 어떤 균열을 겪게 된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균열은, 과수원의 사과를 훔쳤다는 영웅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영웅담으로 인해 일개 그룹에서 인정받으리라 생각했던 싱클레어의 생각과는 달리, '몰래 훔쳤다'라는 약점이 잡히게 되어 프란츠 크로머에게 물건이나 돈을 계속 가져가 바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 상황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이다. 부모님께 말할 수도, 선생님께 말할 수도 없으며 해결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도둑질과 거짓말, 이 두 가지는 싱클레어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는 환각을 보기도 하며, 정신 분열에 준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막 열한 살쯤 되는 나이에, 나는 이렇게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와 맞닥뜨렸다. 바로 따돌림이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 '누군가 나를 괴롭힌다'라는 개념은 어린 내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유년의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강구했다. 싱클레어가 부모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할 수 없던 것과 달리 나는 그것을 부모와 선생님에게 말했다.
엄마는 도저히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을 내놨다. 바로 '똑같이 해라'라는 것이었다. 그 애가 욕을 하면 나도 똑같이 욕하고, 그 애가 밀치거나 신체적인 폭력을 당하면 나도 똑같이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극적이고 얌전한 나의 성향상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엄마는 점점, 그 애를 탓하지 않고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럴 용기도 없느냐, 왜 그렇게 하질 못하냐, 그러니까 걔가 너를 우습게 보는 거다,라고 했다. 나로서는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가족과 가정이 나를 모두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안온한 휴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선생님 쪽은 더했다. '공정'과 '공평'이라는 것이 선생님의 무기였다. 혹시 내가 따돌림당한다고 느껴도 내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잘잘못과 원인과 결과를 따진다. 그 애의 행동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고(그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던 말든 간에) 선생님은 공정이라는 칼을 들고 양쪽에게 모두 사과를 시키거나 무마하고 넘어갔다.
내가 믿어왔던 '바르고, 따뜻한' 세계는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선생님에게 말하기보다 친구들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완벽한 해결책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친구들은 괴롭힘을 막아주거나 슬픔이나 분노를 동조해줄 수 있었지만, 왜 내가 선생님과 엄마에게 이런 식의 완벽한 차단을 당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줄 수 없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내가 친구를 찾았듯, 싱클레어의 앞에도 한 소년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이 바로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할 뿐 아니라, 그의 자아를 깨우는 여러 일들을 하게 된다.

'똑같이 해라'라는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지 못한 것은 나의 성향 탓도 있었지만 내 안에서 명백히 선과 악이 구분되어 있는 탓도 있었다.
그간 나는 주입에 따라 '이것은 착한 일, 저것은 나쁜 일'이라는 나름의 뚜렷한 구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구분하여 지키는 데는 또 하나의 가치관이 끼어들어 있었다. 바로 기독교적 사고방식에서의 '천국'과 '지옥'이었다.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다. 그래서 나쁜 일은 하면 안 된다, 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특이하게도 우리 집에서 교회를 다니는 것은 나뿐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무교(굳이 말하자면 제사를 열심히 모셨기 때문에 유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순전히 2층에 사는 할머니 때문이었는데, 2층 할머니가 돌보는 손녀딸 둘은 유년시절 나의 둘도 없는 소꿉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이 되면 할머니와 손녀딸들은 같이 교회를 가자며 초인종을 눌렀고, 아침에 일어나 디즈니 만화동산을 본 나는 쭐래쭐래 그들을 따라가 성경말씀을 듣고, 찬송가를 부르고, 주기도문을 외우며 달란트를 모으는 성실한 교회생활을 했다. 점심으로 나눠주는 밥이나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엄마나 아빠는 잠에 깨어있었다. 아빠는 온종일 회사에, 엄마도 집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주말에는 늘 항상 피곤했고 일요일 아침과 낮에 아이를 살뜰히 챙겨 교회에서 재밌는 활동도 하고 밥도 먹여 보내는 것은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런 교회를 다니는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무섭게 , 혹은 절대적으로 다가오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바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이다. 쉽게 말하면 착한 일하고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고, 아니면 지옥 가서(천국이 어떤 곳인지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지옥에 대한 묘사는 극단적으로 무시무시하다) 고통받는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으며(치밀하게도 의심하는 것조차 죄가 된다고 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3번 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기에 '착한 아이', '착한 일'에 대한 틀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데미안이 싱클레어와 친해진 뒤, 가장 먼저 던지는 것은 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데미안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서의 유명한 이야기들로,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와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양 옆의 도둑들에 대한 이야기다.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버지의 재산을 받지 못하게 된 카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이며, 카인은 그 죄로 신에게서 어떤 '표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의심을 품을 여지도 없는 이야기다. 잘못된 행동을 했고, 그로 인해 신의 벌을 받았다. 따져볼 것도 없는 권선징악적 이야기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그 이야기는 정말로 특이해. 그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 나오는 대부분의 다른 이야기들보다는 훨씬 특이해."

흥부는 보물이 나오는 박을 탔고, 놀부는 오물과 괴물이 나오는 박을 탔다는 이야기랑 똑같은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특이하다는 것일까?



"카인에 관한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완전히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어. 그러면 대체로 훨씬 나은 뜻을 갖게 되지. 예를 들면 카인이나 그의 이마에 찍힌 표적에, 우리가 설명 들은 대로 만족할 수는 없잖니. 너도 그런 것 같지 않니?"

이 이야기에서 그냥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 '표적'. 데미안은 그것을 짚어낸다. 도대체 해리포터의 이마 상처도 아니고,  표적이 도대체 무엇일까? 상처면 상처라고, 점이면 점이라고 쓰지 표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상처도 점도 아닌 그 무엇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느낀 의문에 대한 구절을 발견한 나는 무섭게 다음 문단을 읽어내 린다.

"어떤 사람이 싸우다가 자기 형제를 때려죽이는 일은 분명 일어날 수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중에는 더럭 겁이 나 굴복하게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러나 그의 비겁함에 대하여 일부러 훈장을 주어 표창하였는데 그 훈장이 그를 보호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니, 그거 정말 이상하잖니."
"물론이야. 하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라는 거지?"

"아주 간단해! 맨 처음에 존재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낸 것, 그건 표적이야.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얼굴에, 다른 사람들을 겁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어. 사람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어. 그가 그들을 압도했던 거야, 그와 그의 자손들이. 어쩌면, 아니면 분명히, 그것은 편지에 찍히는 소인처럼 정말로 이마에 찍힌 표적은 아니었을 거야. 사람 사는데 그렇게 단순한 일은 드물어. 오히려 그건 뭔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그 무엇이었을 거야. 그것은 오히려 시선에 담긴 비범한 정신과 담력이었을 거야. 그 남자에게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겁냈어. 그는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그걸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 대로 설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한테 편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겁 없고 무시무시한 족속 하나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었지. 그래서 이제 이 족속에게 별명 하나와 우화 하나를 덧붙여 놓은 거야. 복수하려고, 견뎌낸 무서움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약간 해롭지 않게 억제해 두기 위해서. 이해되니?"

"응, 그러니까 카인은 그럼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 거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게 오래된, 해묵은 이야기들은 늘 사실이야. 그러나 언제나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지도 안혹, 언제나 사실대로 설명되지도 않지. 간단히 말해서, 내 생각은, 카인은 늠름한 젊은이였는데 그저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에게 이 이야기를 매달아 놓은 거라는 거지. 이야기는 그냥 하나의 소문이었어. 사람들이 온 사방에 떠들고 다니는 그런 무엇이었지. 그러나 카인과 그 자손들이 정말로 일종의 <표적>을 지녔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은 완전히 사실이야."

"그렇다면, 동생을 쳐 죽인 일도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지! 죽인 건 분명 사실이야.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하나를 쳐 죽였어. 그것이 정말 자기 형제였는지 그거야 의심할 여지가 있지. 정말 형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국 모든 인간이 형제잖니. 그러니까 어떤 강한 사람이 어떤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그건 영웅적 행위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다른 약한 사람들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그들은 몹시 탄식을 했지. 그런데 < 왜 너희들도 그 사람을 그냥 쳐 죽이지 않는 거지>라고 누가 물으면 그들은 <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이 그에게 그려주신 겁니다!>라고 말했지. 대략 그런 식으로 그 사기는 이루어졌을게 틀림없어."

카인이 오히려 비범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니! 이 부분을 읽은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성경에 대한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이런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런가 하면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도 데미안은 신랄하게 풀어낸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회개하고 하나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거기 언덕 위에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굉장하지! 하지만 우직한 도둑들에 대한 감상적인 선교 전단용 이야기야! 도둑은 처음에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였어. 시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 근데 이제 막판에 와서 마음이 누그러져 그런 개전과 회개의 징징거리는 축제를 치르는 거야!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너에게 묻겠는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또 정말 엉터리 신부님의 설교일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달착지근하고 부정직하고, 지극히 교화적인 배경에다 측인지심의 엿기름을 곁들인 거지.
만약 네가 오늘 그 두 도둑들 중 하나를 친구로 택해야 한다면, 혹은 둘 중 누구에게 더 신뢰를 줄 수 있겠는지 생각해야 한다면, 그건 아주 분명히 이 징징거리는 개종자 쪽은 아닐 거야. 다른 쪽이야. 회개하지 않은 그 도둑이야 말로 사나이잖아, 개성이 있고 말이야. 그는 개종 따위를 우습게 알았어. 그런 건 그의 처지에서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이겠지.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어. 그리고 자신이 거기까지 가도록 도와준 악마로부터 마지막 순간에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았어. 그는 당당한 개성을 가졌어. 성서 이야기에서는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손해를 보지. 어쩌면 그도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이 두 이야기에 대한 데미안의 말이 이끌어 낸 것은 내 어린 시절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던 선과 악의 구분선에 대한 붕괴와도 같았다.

한층 더불어, 데미안은 새로운 신에 대해 알려준다.
남자이자 여자이며, 선이자 악이며, 천사이자 악마인 '아브락삭스'이다. 출산은 신성하지만 그 과정인 성교는 왜  더러운 것이며 대개 세상의 많은 일들은 완전한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데미안을 통해 나는 유년의 미성숙함에서 자아를 찾아냈고, 그것은 사실 나를 큰 혼돈 속으로 내몰았다.
교회는 그만두었으며, 가족과 학교의 권위 속에서 한걸음 물러나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한 출발점에 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나는 유년과 자아 사이의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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