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을 입은 날은 꼭 마라탕, 떡볶이, 짜장면을 먹게 된다. 모두가 좋다고 정한 메뉴에 “제가 오늘 하얀 옷 입어서요. 짜장면은 내일 먹고, 오늘은 잔치국수 먹을까요?” 반기를 들기는 어렵다.
식당에 모임을 끝내고 온 중년들의 대화도 하얀 옷의 마법을 입증했다.
“어머, (흰 블라우스에) 묻었네.”
“어떻게 해. 빨리 화장실 가서 닦고 와.”
하얀 옷은 깨끗해서 예쁘지만 행동에 제약을 준다. 뭐든 조심조심 먹어야 하고, 주차장에서는 차의 먼지가 묻을 새라 조심조심 빠져나와야 한다. 하얀 옷을 입은 날은 꼼꼼한 사람도 쉽게 칠칠맞아진다. 세상의 보이지 않던 얼룩은 나를 향해 돌진하고, 음식은 선명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아무리 작은 점도 쉽게 눈에 띄었다.
하얀색은 스스로 책망하게 했고, 누군가 실수로 커피라도 튀기면 소중한 사람을 사소한 일로 원망하게 했다. 또 평화롭던 순간을 비상사태로 만들었다. 김칫국물 하나라도 묻으면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화장실로 달려가 요란스럽게 그 흔적을 지워야 했다. 무언가 묻기라도 하면 흰옷에 대한 사랑이 급하게 식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하얀색 옷과 이별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옷 입히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하얀색 레이스 원피스는 외면할 수 없었다. 어찌나 앙증맞은지, 순백을 대체할 옷은 없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
아이가 하얀 원피스를 입은 날, 옷 한쪽에는 초코우유 자국, 한쪽에는 북엇국 자국, 한쪽에는 아이스크림 자국이 순서대로 생겼다. 그 흔적을 지우려 퐁퐁을 묻혀 박박 빨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맞아 하얀색에는 수고로움이 따르지. 나의 수고로움. 빨래하는 자의 수고로움.
그 후, 민트색, 분홍색, 연보라 색 등의 옷을 사 입혔다. 그렇게 다시 하얀색과 이별을 했다.
아이가 커서 초등학생이 되고, 스스로의 취향이 생겨날 때쯤 운동화를 사러 갔다. 아이가 고른 건 그 많은 운동화 중 흰 운동화였다.
“이게 좋아? 다른 것도 봐봐.”
“이게 이뻐.”
“이건 금방 더러워져. 좀 어두운 계열의 운동화로 사자.”
아이를 말렸다. 아이는 말려졌다.
다른 날, 가방을 사러 가서도 아이는 흰 가방을 사자고 했다.
“금방 때 타. 학교 책가방은 일 년 내내 쓰는 건데, 네이비 색 어때?”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아이는 하얀색 물건들을 거절당했다. 아이의 티셔츠, 바지, 치마, 신발, 가방, 운동화 대부분이 블랙, 그레이, 네이비색이었다. 어두운 색 옷 덕분에, 아이가 운동장에 뒹굴어도, 떡볶이를 묻혀와도 핀잔을 준 적 없었다. 블랙은 엄마인 나를 우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에게 하얀색은 꼭 가지고 싶은 색이 되었다.
중학교 입학 전 필통을 사러 간 날, 아이는 당당히 흰 필통을 샀다. 더는 나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가방도 흰색으로 산다고 했다. 흰색에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연신 흰색만 외쳤다. 단호한 아이의 태도에 나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하얀색 운동화를 사지 말라는 말 안에는 미리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빗물이 튕기거나, 웅덩이를 만난다거나, 누군가 발을 밟거나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걱정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무서워서 아이에게 좋아하는 하얀색을 사지 못하게 하는 건, 부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아이가 하얀 옷을 사도, 하얀 가방을 사도 아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하얀색 물건은 아이가 빨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난 또 잔소리 많은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
하얀 물건을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근면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