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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기 Mar 31. 2022

스물셋 뉴욕

똑똑똑. 잘 있었니?

올해 2학년이 된 둘째는 나무 뒤에 숨기 바빴다.

그렇지 않아도 분주한 학교 가는 길

아이에게 지각은 저 세상 말이었다.

학교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400미터

남은 시간은 1분.

아이 등 뒤에 묻은 나무흙을 털어내는 손에

힘이 더 실리는 듯 했다.

아이는 놀랐을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몸을 반쯤 침대에 걸쳤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한 걸음 더.

지금 내가 꿈꿀 수 있는 게 뭐지?


눈을 감고 생각이란 걸 해봤다.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일까.


지난해 가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고

한참을 생각했지만

여전히 답을 못찾았다.


그래서 바꾼 질문은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는 언제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스물세살의 겨울, 뉴욕의 한 가운데를 떠올리고 있었다.


휴학을 하고 6개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떠난

내 생애 첫 해외여행.


간밤의 폭설로 뉴욕 한 가운데에는 어린 아이 키만한 눈이 쌓였고

거리에는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저렴한 가격에 득템한 마크 제이콥스의 노란 장화를 신었다.

스키어들과 난 햇살에 반짝이는 눈만큼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노란장화를 신고 어딜 향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장화를 신고 쭉 뻗어있는 거리를 걷는 나는

취준생에 부자도 아니었지만

차가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진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심장을 어딘가에 내줬나 싶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내가

나는 가장 보고 싶은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가능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비니를 하나 쓰고 출근 인파 속에 밀려들어가

크림 치즈가 넘치게 들어있는 베이글과 아메리카노를 들고

서점 앞에서 먹는 일이

이십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큰 선물이 될 줄이야.


졸업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한 나는

그 추운 겨울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정해진 것 하나 없는 그 때

가도가도 끝 없는 불투명 터널을 걷고 있던 나는

적어도 행복했다.


사진이 담겨 있는 외장하드를 잃어버려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 하나에 압축된 스물셋의 겨울은

수십 번의 봄을 지났지만

그 때 거기 그대로이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30일간의 여행.


그 때의 날 도와줬던 거리의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거리의 나무들도 가로수의 손글씨 포스터도

뉴욕대 주변을 걸었던 학생들도

말하지 않아도 충만했던 거리의 공기들도 안부가 궁금하다.


그 때의 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마흔이 됐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생애주기지만

스물 셋의 나에겐 먼 미래의 사람이겠지.


정신 없이 앞만 보며 살다가

이직하고 이직하고 또 이직하다가

결혼을 하고선 나 없이 살다가

나를 잊기도 하다가

이제 걸음마를 뗀 느낌이다.


왠만하면 엎어지지 않지만

엎어지는 게 두려워 뛰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는 나이.

다치면 연고 바르고 밴드 붙이면 되는 걸 아니까.


잊고 살았다.

잊어야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 때의 기억들에

한 번쯤 안부를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똑. 잘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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