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부자연스러움
'이건 왜 이렇게 비싼 거지?',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사진관과 미술관에 간 많은 이들의 머릿속입니다. 불행히도 그림 옆의 설명만으론 그림에 접근하기에 한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회화를 접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미를 찾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해지기 위하여 의지할만한 것을 원합니다. 그들은 안전하게 매달릴만한 것을 원하고 그렇게 하여 공허함에서 자신을 구하길 바랍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의미한 시간에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물음엔 그렇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겨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얄팍한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떠드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니 그림 내 그림>은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전시회를 갔다고 생각하며 편하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이 글은 마치 피고 버리는 한 개비의 담배와 같습니다. 흥미롭게 읽고 가볍게 잊어버려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10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청춘'이라는 보물은 얼음처럼 빠르게 녹아내렸다. 하지만 내 욕망은 가장 높은 자리의 왕관을 바라봤던 것 같다.
비극의 영원한 조건은 '인간의 삶보다 높은 가치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보다 우월한 무언가는 희생을 강요하게 됩니다. '전쟁'이라는 것 또한 비극의 큰 범주안에 속하죠.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단지 총과 칼로 인한 다툼만이 전쟁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삶보다 높은 가치란 '이념'이 될 수도 있고 '종교'도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부동산'이나 '명품 시계'와 같은 것이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겠죠. 우리 시대는 부의 차지를 위한 전쟁의 시대입니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 잠실 롯데타워 대한민국의 부의 상징으로서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림 속에는 아파트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치된 세 그림 위엔 호탕하게 웃고 있는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호탕한 웃음 아래의 '부의 상징'들은 명성만큼이나 웅장하거나, 그에 맞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웃음소리에 의해 파동 치는 모습을 보자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진지한 무언가 앞에서 조소와 우롱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녹여버리기 때문이죠. 재잘거림과 같은 경박은 어떤 것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경박이란 비극을 해체시키는 근본적인 다이어트 요소입니다. 세상이 조소로 가득 찰수록 모든 것은 그 의미를 대부분 상실한 채 앙상한 현상만 남을 뿐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웃음의 파동에 닿은 '부의 상징'들은 그 의미를 90% 이상 잃은 채 흐물거립니다. 그런 조소는 때론 자기 자신에게 향하기도 합니다. 기안84 개인전 첫 섹션은 '의미의 해체입니다'
무의식 중에 느끼는 불안감
'나 혼자 있는 기분에 잠식되니 불안하다.', '불안에 잠식되니 나 혼자 있고 싶어.' '나 혼자 있는 불안함에 잠식되어 버렸어.' 두 번째 섹션의 3가지 그림의 제목은 <나 혼자> <잠식> <불안>입니다. 이 세 단어는 그것들의 순서를 어떻게 바꾸든 형성되는 문장의 의미가 비슷합니다. 그렇기에 나 혼자, 잠식, 불안이라는 단어가 사실 한 의미로부터 파생된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하고 있습니다.
유명해졌다는 것은 뒤에 메아리를 달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유명함의 정도에 따라 메아리의 크기는 비례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메아리를 뒤에 달고 다니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는 법률에 의해서만 제한받지 않습니다. 비록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삶에서 여라 가지 행위와 표현에 가해지는 제약을 수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자유의 의미가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함'이라 한다면 행위의 제약은 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게 확실합니다.
유명해졌다는 건 수많은 카메라 렌즈 앞에 선 연약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남자의 유명함은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그의 약점, 그의 흠결로써 그에게 작용하겠죠. 혹자는 세계가 문명화됨에 따라 표현의 자유 또한 보장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겉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인 억압은 새롭게 발명되고 자행되는 실정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윤리성이 감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윤리성이 너무 강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우리는 어떤 거대한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부자연스러움을 느낍니다. 잠식, 불안, 나 혼자라는 단어들은 연약한 사람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토록 바랬던 성공은 '유명해진다'와는 사뭇 다른 개념입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카메라 앞에 서는 연약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닌, 카메라 앞에 세우는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